대학 입학으로 시작된 나의 서울 생활은 '최고의 지옥철'과 함께였다. 인천 종점에서 타면 신도림역까지 앉아서 올 순 있지만, 신도림역에 가까워질수록 앞에 선 아저씨의 배가 내 이마를 짓누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쯤이면 앉아있는 것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라 하겠으나 그래도 매번 나는 그나마 내가 차지한 그 한 자리가 눈물겹게 고마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와 신도림역에 서면 그때부터는 한 아저씨의 배가 아닌 수많은 배가, 팔꿈치며 등짝들이 내 온몸을 짓눌러 나는 마치 여름 내내 두꺼운 책에 눌려 박제된 벌레 모양으로 버석해져서는 2호선 환승 지점까지 끌려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2호선에선 사람들에 밀려 이웃한 두 출입문과 정확히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룬 나는 번번이 내려야 할 곳에서 두서너 역을 지나서야 겨우 빠져나와 언제나 반대편에서 되돌아오곤 했다.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는 내 이마로도 거뜬히 세상을 버텼지만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나는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쳐야 했는데 그 결과는 매번 나의 완패였다. 다행스럽게도 지하철 등하교는 한 달 만에 끝이 났고 학교 가까이 살면서 나의 '자리'에 대한 남다른 상념도 파란만장 상경기의 첫 장쯤으로 퇴색되어갈 무렵 나는 또 다른 '자리'에 앉아있는 나와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였고 지하철역까지만 탈 요량이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사람이 있는 정도의, 보통 버스였다. 적어도 내가 탔을 때는. 다음 정거장에서 갑자기 상황은 급변했는데, 무슨 단체인 듯한 사람들이 한 무더기로 올라탔고 그러면서 수없이 내게 부딪쳐 왔다. 그냥 내려버릴까를 고민하던 차에 내 앞자리 승객이 일어났고 나는 냉큼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다음 정거장에 이르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앞차가 고장 나 앞차 승객이 모두 버스에 올랐고 또 다음 정거장들에선 그런 사정으로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들이 기를 쓰고 버스에 올랐다. 내리막길이라 안 그래도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데, 도로까지 꽉 막혀 버스는 미끄러지는 듯하다가 '끼익' 멈춰 서기를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앞차에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었는데 갑작스레 내몰려 졸지에 뒤차 불청객으로 전락한 사람들도, 너무 오래 기다려 지친데다 그래도 안 탈 수 없어 제 온몸을 구겨 올라탄 사람들도, 또 그 사람들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한 채로 발이 밟히고 숨이 막히는, 이미 타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터질 듯한 분노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비명과 고함과 분노 속에서 나는, 내가 운 좋게 차지한 그 한 자리, 그들의 비명과 고함에서 나를 구원(?)한 그 한 자리에 안도하는 나를, 심지어 그들에게 우쭐대고 싶어하기까지 하는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나를 보았다. 논리나 사고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친 무서운 '기득권'이었다. 그 한 자리를 차지한 나는 적어도 그곳에서만은 1%였다.
'분노하라'가 불과 몇 달 사이에 1%의 탐욕을 규탄하는 99%의 '점령하라'로 바뀌었다. 그것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를 '점령하라'고 한다. 1%의 탐욕이 불러온 빈부의 격차와 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라는 99%의 저항. 1대 99의 공존은 이제 더 이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버스 한 좌석을 우연히 점령하고 잠시나마 1%였던 나는 내려야 할 지하철역에서 내리지 못했다. 그 99%가 모두 지하철역에 내려 버려서 버스는 삽시간에 빈 좌석이 더 많아졌는데도, 그래서 내가 차지한 한 자리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나는 더 이상 1%일 수가 없었는데도, 나는 1%의 달콤한 기억 때문에 한참 동안을 내리지 못했고, 그렇게 처음 내가 버스를 탔던 이유를 잊어버렸다.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었는데, 버스는 그곳에 가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는데 나는 1%의 탐욕에 눈이 멀어 정작 가려던 곳에 가질 못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1대 99의 저항을 보며 대부분은 99의 범주에 자신을 넣고 있을 것이다. 1대 99라는 극단에까지 치달은 불평등과 불균형의 문제는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지금의 1대 99에서는 명백히 99 중 하나임에도 1%의 가능성을, 1%의 탐욕이 불러올 끔찍함을 가정해 미리 염려하게 되는 것은 '자리'에 대한 두 기억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때문일까, 단지 그 때문인 것일까?
김계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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