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욕망의 아이콘 '시대의 거울'

입력 2011-10-15 08:00:00

빛나는 새벽이라는 뜻의 화학기호 오로라(AU)로 표시되는 금(金). 금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며 '부'(富)와 사치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욕망의 아이콘으로 역할 해 왔다. 또 반짝이는 속성 때문에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최고의 장식으로 여겨져 왔으며, 변하지 않는 성질로 '불멸' 즉 영원한 삶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금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게 없다. 쇠는 차와 배를 만들고, 집을 짓고, 기계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지만 금은 고작해야 장신구를 만들거나 금괴로 만들어 금고에 보관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는 늘 금을 갈망해 왔다. 왜?

◆올 들어 35%까지 폭등

최근 금값은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치솟았다. 정말 '천정부지'라는 수식어가 딱 알맞을 정도다. 과연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금값은 최근까지만 해도 온스당 1천900달러를 돌파하는 등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해 왔다. 특히 국제 금값은 올해 초 1천400달러 선에서 시작해 35%의 급상승을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금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와 증시불안 등이 확산되는 상황에서는 금의 인기가 더욱 치솟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오히려 금값이 폭락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 지난달 초만 해도 온스당 1천900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보였던 금값은 한 달 만인 이달 11일에는 1천662.4달러까지 떨어졌다.

금값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경제 체력과 연동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달러의 가치가 하락할수록 전통적으로 금은 불황에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안전자산이라고 여겨지면서 불황일 때 금값은 크게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금값 폭락에 대해 전문가들은 "글로벌 신용경색 우려가 점차 커지자 뛰어야 할 금값이 오히려 하락세로 돌아서고 있다"며 "미국의 경기 둔화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고 있는데다 유럽 재정 위기가 심화되면서 현금 확보가 투자자들의 최우선 과제가 되자 달러가치가 상승하면서 달러로 거래되는 금값은 자연히 하락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사실 금값이 이렇게 치솟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1971년까지만 해도 브레턴우즈 체제 하에서 온스 당 35달러에 고정돼 있던 금값이 500달러를 넘어선 것은 고작 2005년 이후의 일이다. 금값은 1980년 1월에 850달러를 돌파한 적이 있지만 이후 25년 동안 대체로 500달러를 밑돌았다. 그러나 2005년 11월 500달러를 넘어선 이후 2006년 4월 600달러, 2008년 1월에는 850달러의 벽을 뚫더니, 2008년 3월에는 금값 네자릿수 시대(1천달러 돌파)를 열었다. 그리고 2011년 4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1천500달러를 넘어선 뒤 올 9월까지 1천900달러까지 쉼없이 치달아 왔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금을 향한 욕망

인간의 삶에는 그다지 활용도가 많지 않은 금.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항상 금을 갈망해왔고, 그 부질없는 욕망이 역사와 문명을 바꿔놓기도 했다. 경제학자인 피터 번스타인이 쓴 '금,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라는 책에는 금이 어떻게 인류의 문명을 바꿔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직 파라오만이 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약 13만㎏의 금을 사용해 성소피아 성당을 지었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정이 3세기에 이르는 오랜 세월동안 계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랍의 풍부한 금을 손에 넣기 위한 봉건 영주들의 탐욕에서 비롯됐다는 시각도 있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나서게 만든 힘의 원천도 바로 금이었다.

사람들은 금이 넘치는 세상을 꿈꿨다. 돌이나 흙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에 목숨을 걸었고,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이상향은 바로 금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19세기 신대륙의 역사는 '골드러시'로 요약될 수 있다.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된 이래 1853년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는 10만여 명이 캘리포니아로 몰려갔다.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1851년 시드니 메커리 강의 지류에서 한 시민이 사금을 캐기 시작하자 6개월 만에 5만여 명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20세기 초 일제 식민지 치하 우리나라에서도 골드러시가 있었다. 1933년 한 해 동안에만 5천25개의 광산이 개발됐고, 1934년에는 금광 개발 허가 출원 건수가 5천972건, 1935년 역시 5천813건에 달했을 정도로 '황금광 시대'였다. 여기에는 일본 군국과 과정에서 금이 필요했던 일본의 산금 정책이 배후에 있었다.

◆한국사회, 금의 사회학

한국 사회에서 금은 부의 상징이자 환금성 뛰어난 최후의 저축 수단으로 각광받아 왔다. 그 가장 흔한 사례가 바로 '돌반지'다. 예전에는 아기 백일잔치에는 반 돈짜리 백일반지, 돌잔치에는 한 돈짜리 돌반지를 선물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었다. 예로부터 금은 부를 상징했기 때문에 백일반지, 돌반지에는 건강하게 커서 부자가 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 2세를 위한 선물로 제격인 것이다. 이렇게 자녀 돌잔치 때 받은 금반지를 장롱 깊숙이 보관했다가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때 등록금으로 쓰거나, 살림이 어려울 때 생활비에 보태는 등 요긴하게 쓰였다.

결혼 때 패물로도 금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부모는 자녀를 결혼시키면서 살림이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금붙이를 마련해 줬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해 평생 손가락에 끼고 있던 가락지를 서슴없이 빼 생활비나 교육비로 썼다.

특히 이들 금붙이는 나라가 어려울 때 빛을 발했다. 구한말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 1천300원을 갚기 위해 아낙네들이 손에서 빼낸 패물반지는 나라를 구한 '보국반지'로 불렸고, 돌반지는 IMF 구제금융을 극복하기 위한 전국민 금모으기 운동의 주요 품목으로 '애국반지'로 불리기까지 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사랑'을 약속하는 커플링에도 아직 금이 대세다. 유행에 따라 그 색상은 황금빛에서 은빛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 속은 '백금'으로 '금붙이'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 이것은 금의 변치 않는 속성 때문이다.

한때는 금 마케팅이 온 나라를 휩쓸며 식용금의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기도 했다. '럭셔리'를 과시하는 사치의 수단으로 금이 사용된 것. 4, 5년 전, 삼겹살에 금가루를 얹은 '금삼겹살'등 금가루를 얹은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금가루 피부마사지, 금가루를 넣은 술 등도 등장했다. 당시 휴대전화 고리에도 금돼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너도나도 한 돈짜리 금돼지 한 마리를 달고 다녔고, 심지어는 도금된 짝퉁 금돼지도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이제 금값이 말 그대로 금값이 되면서 우리 생활 속에서 금을 찾기는 상당히 어려워졌다. 최근 아이 돌 잔치를 치른 이지현(30'여) 씨는 "금 한 돈 값이 24만원을 넘어서다 보니 100여 명의 하객들 중 돌반지를 준 사람은 친척 어른 2분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다수가 봉투로 대신하더라"고 했다. 그나마 금은방의 가장 큰 고객층이라는 혼수시장 역시 축소되긴 매 마찬가지다. 워낙 금값이 비싸니 예전처럼 묵혀뒀다 어려울 때 팔아 쓴다는 용도가 의미를 잃은 것. 게다가 요즘 신세대들은 '격식'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다 보니 패물을 최소화하는 추세다. 오는 12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최현용(34) 씨는 "폐물비용이 쓸데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은 못 꺼내고 있었는데 여자친구가 먼저 커플링만 하고 대신 신혼여행을 좀 더 좋은 곳으로 가자고 이야기하더라"고 말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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