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하늘의 그물

입력 2011-10-13 15:09:32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치지 못한다(不及)' 진리를 일찍 터득

그동안 전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풍광과 음식에만 매달린 감이 없지 않다. 섬이나 바닷가나 내가 찾아가는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나의 불찰이다. 전남 신안군의 임자도에 들렀다가 이곳이 우리나라 문인화의 대가인 우봉 조희룡의 유배지임을 뒤늦게 알고 이렇게 각성의 시간을 갖는다.

우봉은 1789년 생으로 추사보다 3년 뒤에 태어났다. 글씨 쓰기와 난 치는 법을 추사에게서 배워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추사는 55세 때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을 갔으나 우봉은 63세에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이곳 임자도로 귀양 와 3년을 바닷가 오두막에서 기거했다. 추사는 서귀포 대정읍 동문가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사방에 둘러쳐진 곳에 위리 안치되었고, 우봉은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뿐인 이흑암리(당시 흑석촌)란 곳에서 갇혀 살았다.

우봉은 열정과 광기를 지닌 화가였다.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치지 못한다(不及)'는 진리를 일찍 터득했다. 스승인 추사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을 신봉했지만 우봉은 '그림과 글씨는 손끝에 달린 것이다. 손재주가 없으면 종신토록 배워도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며 손기술인 수예론과 그림 그리는 자체를 즐기는 유희론을 주장했다.

추사는 서권기 문자향을 가슴에 담아 그 정신이 화가의 창자와 뼛속으로 스며든 후에 기운이 손가락으로 흘러나와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중국 이론을 그대로 추종했다. 그러나 우봉은 중국 화법이 추구하는 이념과 기법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 모든 이의 눈에 익은 진경산수를 기존 방식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 산과 강을 조선 산수화로 그렸을 뿐이다. 우봉 그림의 뼈대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이다. '앞서 가는 남의 수레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표절과 모사 모창이 판치는 이 시대에 경종이 될 만한 선지자적 업적이다.

추사는 제 길을 걷고 있는 우봉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 난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길을 면치 못했으니 그의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추사가 그의 서자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고 하니 멘토를 따르지 않는 멘티에게 많은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오히려 우봉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하여 그의 화풍을 흔들림 없이 이끌고 나갔다. 허균과 이덕무도 우봉을 따랐으며 후배 화가 유숙에게 배운 괴짜 화가 오원 장승업도 그림 속에서 우봉의 맥을 이어 명품 매화도를 완성해 냈다.

추사와 흥선 대원군이 난초의 달인이라면 우봉은 매화의 귀재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이 있듯이 매화 그림에 관한 한 추사도 우봉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도 '완당평전'에서 "우봉은 완당 일파 중에서 최고의 화가이며 산수와 매화는 추사를 앞지른다"고 말하고 있다.

프로골프 선수 중에는 잠잘 때도 클럽을 품고 자는 이가 있는가 하면 최근 타계한 최동원 감독은 죽는 순간까지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우봉 또한 방에 매화 병풍을 항상 두르고 살았으며 매화차를 마시며 매화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그림과 매화시를 지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유배 초창기엔 '만구음관'(萬鷗吟館'1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짖는 집)이라 했지만 섬 생활에 익숙해지고는 '매화백영루'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나는 이번 임자도 기행 중에 유배지 바닷가에서 거칠고 찬 구름 그림(황산냉운도)을 그리면서 고독을 씹고 살았던 우봉의 오두막 터를 찾아보지 못했다. 돌아오는 뱃전에서 문득 정호승 시인의 '하늘의 그물'이란 시가 우봉의 춥고 시린 마음 한 자락을 덮고 있는 것 같아 몇 번이나 그 시를 읊조렸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 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둘 떼지어 빠져 나갑니다."

임자도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우봉의 오두막 터에 막걸리 한 상 차려두고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 채'로 시작되는 '클레멘타인'을 남도 창(唱)하듯 흐느적거리며 부르고 싶다. 귀양살이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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