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농업집산화로 희생된 사람은 7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에서만 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1천만 명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1942년 8월 스탈린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1천만 명의 농민을 처리했다." 또 이오시프 디아드킨이란 소련 학자의 '1927~1958년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자연사의 추정 평가'란 연구서도 같은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디아드킨은 "농업집산화와 '계급 청소'의 시기(1929~1936)에 약 1천만 명이 비자연사를 당했다"고 추정했다.
그 책임은 인구조사 관리가 뒤집어썼다. 1937년 인구조사에서 대규모 아사(餓死)로 인구가 격감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인구를 줄이는 배신 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인구조사위원회 위원들을 처형해 버렸다.
책임 전가는 이뿐만 아니었다. 스탈린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기 2년 전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나치의 전쟁 준비를 위한 4개년 계획의 책임자였던 괴링과 비밀 계약을 맺어 독소 간 무역 거래를 재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협상은 그와 병행해 추진될 정치 협상을 히틀러가 허락하지 않아 결렬됐다. 그러자 스탈린은 파시스트와의 협상이란 불미스런 자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소련 측 협상자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했다.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선의를 맹신한 결과가 낳은 독소전 초반의 궤멸적 패배의 책임도 부하 장군에게 떠넘겼다. 당시 서부집단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성을 반역죄로 몰아 총살하거나 체포했다. 서부공군 관구 사령관 코페츠처럼 '알아서' 또는 강요를 받아 자살한 경우도 흔했다. '무오류'의 독재자가 자신의 실책을 부하에게 뒤집어씌우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2009년 1월 화폐 개혁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작년 초 총살당한 북한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의 후임인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형도 올 6월 숙청됐다고 한다. 이들을 포함, 1990년대 이후 숙청된 고위 경제 관료는 최소 9명에 이른다는 소식이다. 이 중 1명은 자살했고 5명은 행방불명이다.(북한에서 행방불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스탈린의 책임 전가 DNA가 김정일로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b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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