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기절낙지

입력 2011-09-22 14:20:53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먹을 때면 꼬물꼬물 살아 움직여

낙지는 맛이 있다. 나는 낙지를 좋아한다. 낙지를 오랫동안 먹지 않으면 먹고 싶은 생각이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럴 때마다 여행이나 산행계획을 세워 낙지 산지로 떠난다. 그곳에는 싱싱한 낙지를 도시의 절반 가격으로 먹을 수 있고 차창에 비친 낯선 풍경은 덤으로 즐길 수 있다.

도시의 수족관에서 건져 낸 낙지 맛과 바다 뻘 속에서 잡아 아침 시장에 나온 낙지 맛은 분명 다르다. 신선도의 차이도 물론 있지만 기분이라고 흔히 표현하는 느낌의 차이가 맛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김장 김치를 길게 찢어서 먹는 맛과 송이버섯을 쇠칼이 아닌 대나무 칼로 써는 것이나 막걸리는 놋잔이나 사발에 따라야 제 맛이 난다는 생각은 편견이 아니라 의식이 심판하는 정당한 판결이다.

낙지는 어떤 요리를 해도 맛이 있다. 현지의 허름한 목로 집에 도착하면 우선 '탕탕낙지' 한 쟁반을 시켜 목부터 축인다. 컬컬해진 목은 위장의 척후병으로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들이켜야 겨우 안정을 얻는다. 술 한 모금 마신 후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한 산 낙지 한 점을 참기름 소금에 찍어 입에 넣으면 이 세상이 온통 눈 아래로 보인다.

연포탕도 갯가의 별미음식 중의 하나다. 연포탕은 생선 한 마리와 여러 가지 조개들을 냄비 밑바닥에 깔고 약간의 파와 붉고 푸른 풋고추를 쑹덩쑹덩 썰어 넣은 다음 산 낙지 몇 마리를 얼른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끓인 백탕을 말한다. 이 탕을 끓이는 냄비 뚜껑은 유리로 되어 있다. 그 안이 훤히 보인다. 낙지는 발밑에 있는 놈들 위에서 거만하게 군림하다가 국물이 쓰나미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결국 익사하고 만다. 서서히 죽어가는 낙지의 모습은 한 편의 인생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여행 도반들이 목포를 다녀오면 음식 자랑이 늘어진다. 영란회집의 민어회, 독천식당의 세발낙지, 금메달식당의 홍어 삼합 등이 이야기 밥상의 주인공으로 올라앉는다. 때로는 무안의 곰솔가든(대표 조복순'061-452-1073)에서 먹었던 기절낙지 쪽으로 화제가 바뀌면 그곳에 가보지 못한 이들은 기가 죽고 다녀온 사람들은 기절했다가 살아난 낙지처럼 기가 펄펄 살아 입에서 침을 튀긴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 이렇게 훌쩍 길을 떠나지 못했다면 아직도 기절낙지를 먹어보지 못한 촌놈으로 남아 있을 뻔했다. 기절낙지 반접(10마리) 값은 12만원이다. 낙지 외에 홍어와 돼지고기 묵은김치 등이 덤 안주로 따라 나오지만 과하긴 과한 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여행길에 먹었던 가장 비싼 점심이었다.

산 낙지를 요리할 땐 바닷물로 씻어야 하지만 기절낙지는 미끈거리는 점액질을 민물로 여러 번 치대듯이 빨아내야 한다. 낙지 다리는 칼이 아닌 손으로 떼어 내 찢어야 하고 대가리는 익혀야 한다. 낙지 다리를 접시에 가지런히 배열한 후 대가리를 본래 모양대로 올려놓는다. 그러면 민물에 신물나도록 고역을 치른 낙지는 죽은 듯이 누워있다. 그렇지만 양파 마늘 생강 식초 등으로 만든 붉은 소스 접시에 담겨지기만 하면 거짓말처럼 꼬물꼬물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기절낙지다. 아니다. 예수처럼 다시 살아난 부활낙지다.

시어머니 밑에서 기절낙지에 대한 기술 전수를 받아 3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온 안주인 조 여사는 "손님이 드실 때까지 살아 꿈틀대도록 낙지를 다루는 게 요령"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메뉴에 낙지 가격을 시가로 적은 것은 싼값에 들여올 땐 싸게 받고 비싸게 들여오면 비싸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가격을 명시하지 못한다"면서 "여름철이 가장 비쌀 때이니 봄에 오셔요" 한다.

소싸움에 나서는 황소는 불끈 힘을 쓰려고 통상 낙지 몇 마리를 먹고 출전한다. 그런데 우리 다섯 도반들은 암소도 없는 타향에서 기절낙지를 2마리씩이나 먹었으니 남아 도는 이 기운을 어디다 쓰지. 정말 고민이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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