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일지매, 로빈후드가 안 나오려면

입력 2011-09-19 10:56:16

오케스트라가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려면 모든 연주단원들 각자의 음악적 기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 하모니카도 못 부는 친구에게 오보에나 클라리넷을 맡기거나 트롬본 불던 연주자가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난 제1 바이올린 자리에서 첼로를 켜겠소'라고 나선다면 그 오케스트라는 천하의 카라얀이나 평양 갔다 온 정명훈 씨가 지휘봉을 잡아도 장마당 품바 소리밖에 낼 수 없다.

에스키모 개 썰매가 빠른 이유도 썰매를 끄는 개들이 모두 다 빠르게 달리는 재주를 갖고 제 위치에서 서로 호흡을 맞춤으로써 힘의 균형이 효율적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만약 썰매를 잘 끄는 개 대신 고양이나 원숭이를 중간 중간 끼워 넣어 달리게 한다면 제대로 속력을 낼 리가 없게 된다. 모든 일이나 조직이 제대로 움직이려면 거기에 맞는 적임자가 각자 제자리 지키기에 충실해야 한다. 오케스트라나 개썰매처럼 기업이나 나라도 근본이치는 마찬가지다.

지금 최첨단 IT 국가라는 나라에서 날씨 좀 더워졌다고 병원이고 경찰서고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된 것도 제자리를 제대로 못 지킨 탓이다. 전력거래소의 임원 절반이 전기의 전(電)자도 모르는 까막눈 낙하산 출신들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썰매 속에 고양이가 낀 꼴이다. 그런 까막눈 전기 책임자들을 앉혀 놓고 '여러분 수준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저 후진국 수준'이라고 질책을 했지만 따져보면 수준 낮은 까막눈들을 전력 관리 심장부에 임원으로 내려 보낸 정부의 수준이 먼저 질책당해야 한다.

고양이나 원숭이를 개 썰매에 끼워 넣어 썰매 속도를 떨어뜨리게 한 곳은 한심한 단전 소동을 빚어낸 전력 부분만이 아니다. 새로 끼워 넣으려는 장관 후보 청문회서는 왜 또 그렇게 시골다방 고장 난 레코드처럼 위장 전입, 부동산 세금 탈루가 빠지지 않고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안철수 원장 같은 IT 업계 젊은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 후보군으로 솟아올라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는 것 또한 낡은 정치판이 자초한 현상이지만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품바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한다.

아직은 스티브 잡스 발꿈치에도 못 미치는 IT CEO 위치에서 대학으로 위치를 옮기고 다시 몇 달도 안 돼 시장 자리로 위치를 바꾸려 했다가 하룻밤 사이 대권 스타트라인 위치에 서는 듯한 변신은 이제껏 잘 불고 있던 트럼펫을 내던지고 '나 이제 제1 바이올린 맡겠소' 하다가 다시 '아니 심벌즈를 칠지도 모르겠소' 하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 안 된단 법은 없지만 십중팔구 곡을 망치고 관객(국민)을 객석에서 떠나버리게 할 위험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위한다면 시장 출마나 대권 소설 쓰기보다는 스티브 잡스를 잡아낼 만한 세계적 IT 업계 길을 계속, 충실히 가는 것이 나라와 국민에게 더 기여하는 길이다. IT 업계 젊은 친구가 대통령 자리까지 넘봐도 45% 안팎의 지지율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그가 만능 연주자이리라고 인정해서라기보다 로빈후드나 일지매를 기다려온 민심의 반사작용으로 봐야 한다. 로빈후드나 일지매는 집권자의 부패와 무능, 서민 생활의 피폐가 불러낸다. 도둑이라도 제 분수조차 제대로 못 지키는 권력자들보다는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금 탈루, 위장 전입 같은 닳고 닳은 청문회 레코드판에 염증 난 민심, 전기 전(電)자도 모르는 낙하산 까막눈들에 의해 불 꺼진 세상을 당해본 민심이 로빈후드, 일지매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철수도 영희도 바둑이도 저마다 일지매, 로빈후드가 돼 제 전공, 제자리 다 차 던지고 대권 후보, 시장 후보, 높은 자리만 찾아 나서는 나라는 언젠가 국가 동력의 불이 꺼지는 나라로 전락한다.

노자(老子)는 말했다. '갑자기 부는 회오리바람은 한나절을 지탱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는 하루를 계속하지 못한다. 하늘의 일에서도 한순간에 일어난 변화는 이처럼 오래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의 일에서야…'라고. 어수선한 세상 속에 건듯 부는 바람을 나를 위한 바람으로 착각하여 함부로 남의 자리, 남의 썰매에 끼어들어 한바탕 바람을 타려 드는 것은 자신과 모두를 위해 이롭지 못한 일임을 경계한 말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각자 자기 영역과 분수, 제 위치를 잘 지켜내야 사회와 나라가 튼튼해지고 상생한다. 각자 제자리 제대로 잘 지키면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고, 너도나도 딴생각에 빠지면 일지매, 로빈후드가 소설책 밖으로 튀어나온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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