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에서 호우주의보나 폭설주의보를 내리듯이, 금융감독원이 '보이스피싱주의보'를 발령했다. 얼마나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리길래 주의보까지 발령할까 싶다.
보이스피싱은 음성(voice)과 개인정보(private data)와 낚시(fishing)를 합성한 말로 전화를 통해 빼낸 개인정보로 금융 사기를 치는 신종 범죄이다. 음성으로 낚시질을 한다는 조어의 발상이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만연해 있으니 놀랍기도 하다.
신종 범죄라고 하지만 사실 보이스피싱은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삭은 당시 관례대로 죽기 전에 맏아들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했는데, 둘째인 야곱이 몸에 털을 붙여서 축복을 가로챘다. 형 에서의 몸에 털이 많았으므로 야곱이 형으로 변장하여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제가 에서올시다' 하고 사칭(詐稱)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성서의 역사는 180도 변하게 된다. '창세기'가 모세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니 대략 3천500년 전에 있었던 보이스피싱인 셈이다.
내가 어릴 때에도 보이스피싱은 요즘 못지않게 잦았다. 사기꾼들은 무턱대고 아무 집 대문이나 두드려 "아주머니, 오늘 아들이 교통사고 났어요" 하고 말한 후 허둥대는 모친에게 이러쿵저러쿵해서 돈을 뜯어냈다. 보이스피싱이 제대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은 전화기가 대중화된 1970년대 말부터였다. 사기꾼들은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군에 간 아들이 어쩌고, 학교 간 딸이 어쩌고 하면서 엄마들의 정신을 다 빼놓았다. 그런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고 시민들도 서로 정보를 교환했지만 정작 벼락이 본인에게 떨어지면 혼비백산해서 고스란히 당하기 일쑤였다.
요즘 들어 보이스피싱은 과거보다 더 빈번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에는 10여 통이 걸려오기도 한다. 물론 속지 않는다. 전화선 저쪽에서는 꽤 고생을 하지만 그동안 무수하게 언론이나 이웃을 통해 주의를 들었던 터라, 조롱하며 전화를 끊는다. 나는 결코 속을 일이 없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지난 3년간 보이스피싱에 성공한 것이 1만 5건이나 되며 피해액이 무려 1천5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범죄 집단이 몇인지 모르나 이만하면 기업 수준이다. 결국은 내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운 좋게도 벼락을 제대로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 속지 않을 것 같은데도 왜 자꾸 속을까? 그것은 우리가 의존하는 문명의 기기들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정밀함을 자랑하는 휴대폰과 인터넷은 오히려 세포(細胞)처럼 정교한 '빈틈'을 제공한다. 거기다 우리의 이성은 더 치밀한 상상력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휴대폰에 뜨는 발신자 번호를 믿고 있었던 수용자는 그 발신자 번호로 인해 사기를 당한다. 이를테면 딸의 전화번호가 발신자로 떴는데 누군들 딸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경찰청이라고 자칭하는 보이스피싱 뒤로 들려오는 배경 소리가 분명히 경찰 수사과의 소음이었으므로 상대를 믿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기기들은 더 발전된 사기술로 전환되고 더 기민한 상상력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새 기기가 개발되는 속도와 더불어서 보이스피싱의 기술도 점점 발전한다.
그러고 보면 하나의 대상을 두고 문명의 밝음은 오른쪽에서, 범죄의 어두움은 왼쪽에서 나란히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양화(陽畵)이고 하나는 음화(陰畵)이다. 하나는 밝음의 상상력이고 하나는 어둠의 상상력이다. 이런 대립쌍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깃든 충돌하는 대립쌍처럼, 이 역시 우리가 마땅히 겪으며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야곱이 몸에 털을 발라 아버지를 말로 속이는 것이나, 무턱대고 대문을 두드려서 집주인에게 사기를 치는 일은 너무 원시적이어서 오히려 아련한 느낌마저 든다. 오늘날 나날이 개발되는 전자매체는 동시에 끝없이 휘황찬란한 음화를 양성시킨다. 나는 이 같은 오랜 현상이 바로 문명과 인간의 숙명이 아닐는가 탄식하면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글을 맺는다.
그때, 착란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여긴 수원 경찰청입니다. 지금 선생님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되어 조사 중에 있습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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