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 탈락 군악대원·군부때 연합서클 강사…이형근 대구오페라하우스 관장

입력 2011-09-17 07:58:00

대구 오페라하우스 이형근 관장이 텅 빈 객석에서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지휘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대구 오페라하우스 이형근 관장이 텅 빈 객석에서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지휘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영남지역 최초의 민간 악단인 바로크 관현악단 창단연주회 팸플릿 표지.
영남지역 최초의 민간 악단인 바로크 관현악단 창단연주회 팸플릿 표지.

"로빈슨 크루소 같은 모험정신으로 오페라하우스까지 왔습니다."

지난해 초부터 대구 오페라하우스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이형근(1951년생'서울대 음대 기악과 70학번) 관장은 올해로 진갑인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모험'이라는 두 음절의 화두를 던졌다.

'리처드 기어를 닮은 로빈슨 크루소' 이 관장을 추석 연휴 전날인 9일 저녁식사를 겸해 만났다. 간단한 음료(?)와 함께 5시간 동안 그의 인생 풀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관장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역시나 '모험'. 다소 다르게 표현하면 '도전'이었다. 때론 무모할 정도로 세상의 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벽을 다소 허물기도 했다.

처음 만난 기자에게 두서없이 자신의 일대기를 털어놓으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했나 보다. "제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이런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데 얘기하고 나니 기분이 썩 상쾌하진 않습니다. 할 얘기, 안 할 얘기 구분도 잘 안 되고, 낯간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 관장은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돌아봤지만 막상 기자를 통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이었나 보다. 추석 연휴가 지난 이후에도 '인터뷰가 제대로 된 건가요?'라며 연방 걱정이다.

인터뷰도 '모험'인데 다소 조심스러운 모습은 그 속에 담긴 그의 내면과 섬세함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온 이형근은 자신만의 '모험여행'을 의미 있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대구농림고의 밴드부 악장

어릴 적 이형근은 역시나 싹이 푸릇푸릇했다. 실로폰, 하모니카 등 악기와 음악을 좋아하는 로빈슨 크루소였다. 그는 유아시절 장롱 서랍장 위 아래 고리 2개에 까만 고무줄 7개를 연결해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조율할 정도였다.

인생의 첫 모티브는 역시나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의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였다. 그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실제 죽창을 사서 무인도로 가려 했다. 공부하는 범생이와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그가 현실에서 택한 모험은 대구농림고 밴드부였다. 대륜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유도를 했으나 다리가 크게 부러지는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운동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가 서울대 기악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대구농림고 은사 권오갑 선생님은 그의 남다른 재능을 보고 3학년 1학기까지 마친 상태에서 모교 졸업을 포기하고 다음해에 '관학기의 명문' 서울 성남고 밴드부에 편입하도록 도왔다. 그는 서울대 입학을 마음먹고 난 후에는 4개월간 라면만 먹고, 온몸에 부스럼이 생길 정도로 '열공'(열심히 공부)해 결국 서울대 기악과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제가 생각해도 그때의 제 모습은 정말 놀랍습니다. 서울대와 저는 조금 맞지 않는데요. 하하!"

#2. 해군 군악대 부정입대(?)

이형근은 대범하고 강했다. 학창시절 유도를 하다 크게 다친 다리 때문에 해군에 지원했다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필기-실기에서 1등을 차지한 그를 해군 군악대장이 특별 입대를 허락했다. 그만큼 그의 입대 의지도 강했다.

또 한 번 난관이 봉착했다. 역시나 자대 배치 후 신체검사에서 또 문제가 됐으나 진해 군악대장이 그의 재능과 음악으로 군에 봉사하려는 의지를 높이 사 군악대 활동을 하도록 배려해줬다. 그는 상병 시절까지 해군본부 군악대에서 열심히 나라를 위해 봉사하다 다친 다리가 뒤로 꺾이는 부상을 당하면서 의병제대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해군 군악대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고, 제대 이후에는 국립교향악단에서 트럼펫 연주를 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제 인생의 모험의 장이 되어준 대한민국이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는 국립교향악단 단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다 '복잡한 서울 생활이 싫다'며, 고향 대구로 내려왔다.

#3. 바로크 관현악단, 내 혼이 서린 곳

대학교 음대 강사로 지내던 시절, 그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그 DNA 속 로빈슨 크루소 정신이 또다시 발현한 것이다. 1980년 군부 시절, 그는 음악 폭탄을 과감하게 터뜨렸다. 바로 영남지역 최초의 민간 악단인 바로크 관현악단을 이끈 것이다. 이 당시로는 혁명적인 출발이었다.

영남대와 계명대, 대구가톨릭대(당시 효성여대) 3개 학교 음대생들의 연합서클 형태로 오케스트라를 할 수 있는 인원(67명)이 모인 것이다. 연합서클 모임 등은 감시를 받던 시절이어서 그 출발은 어려웠고, 현직에 있던 음대 교수들은 이형근이라는 음대 강사가 이 교향악단을 태동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로빈슨 크루소답게 먼저 일을 저질렀다. 계엄령이 해제되자마자 9월에 바로크 관현악단의 첫 창단 연주회를 30여 명의 관객만 참석한 가운데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대구시민회관에서 개최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촌스럽고, 투박한 음악이었지만 그 열정이나 노력은 우리나라 음악사적으로 평가할 만 합니다. 너무 행복한 시절이었지요."(잠시 회상)

이렇게 태동한 바로크 관현악단은 창단 이듬해인 1981년부터는 대구시민회관에서 화려하게 연주회를 성공시킬 수 있었으며, 당시 언론도 크게 다뤘다.

#4. 오지로 가는 교향악단

"태어나 처음 듣는 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경북에 사는 도민들은 감격해했습니다. 경북도민 전체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골고루 누리도록 하고픈 또 다른 도전과제가 생긴 셈이지요. 또 DNA 속 '그 분'(로빈슨 크루소)이 발동하더군요."

바로크 관현악단을 이끈 이형근이 슬쩍 대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세계가 보인 것이다. 그는 군위군 면소재지나 의성군 읍내, 영천시내 등지에서 연주회를 열면서 경북도민들에게 오케스트라 음악을 선사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졌다. 그래서 '생애 최초 클래식 음악감상회'와 '오지로 찾아가는 오케스트라' 등의 형태로 경북도민들을 위한 음악회가 생겨났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이형근은 악단의 예산 문제, 개인적인 생활고 등으로 죽는 것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죽으려고 하니 다시 용기가 생겨났다. '내가 만약 죽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하다 죽는다면 누군가 알아줄 것이다.' 이 마음은 생기가 죽었던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10주년 공연 인사말을 부탁하고, 다시금 경북 오지에 품격 있는 음악회를 선사할 기회를 만들어간 것이다.

이런 사연과 노력들로 인해 그는 바로크 관현악단 단장에서 경북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그리고 경북도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30년 가까이 활동하며 금복문화상, 대구음악상 등을 받았다. 결국 바로크 관현악단이 모태가 돼 경북심포니, 경북도향으로 이어진 것이다.

#5. '아하! 오페라' 새 출발!

경북도립교향악단 지휘자를 그만두고 이형근은 3년간 특별한 활동 없이 쉬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후배들을 만나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아무 자리나 갈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초 대구오페라하우스 관장 공모가 있었는데, 여러 차례 잡음이 있었던 과정을 지켜본 그는 '내가 역할을 해보자' 싶어 부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예감은 다시 한 번 적중했다. 음악적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한길을 걸어오다 보니 심사위원들이 그를 선호한 것이다.

맡았다. 시드니가 아닌 대구오페라하우스 관장. 또 저질렀다. '아하! 오페라'다. 이번에는 오페라의 대중화를 선언하며 적은 예산으로 최상의 오페라를 만들어 대구시민 및 경북도민에게 부담없이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준 것이다. 그는 제작비용에서 거품을 확 빼서 억대가 아닌 수천만원으로 오페라를 만들었다. 입장료는 1만~2만원. 오페라 관람의 문턱을 낮춰 오페라의 저변을 확대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도 단체 관람 기회를 줬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습니다. 전석 매진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2년에 12번 오페라 공연을 올린다고 했을 때, 2만4천여 명이 옵니다. 그 중 20%만 오페라 마니아가 되면 대구의 오페라 관람 문화가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대구의 로빈슨 크루소인 이형근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열 살 아래인 부인 변현숙 씨다. 그는 "남편이 하는 일에는 묵묵히 함께해 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이형근은 3년 전 대구음악상 수상 때는 모든 공을 부인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의 두 아들 중 한 명(강원)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바이올리니스트로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지난주 독주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다른 한 명(강주)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현대해상에 재직 중이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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