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 품안에서 잠자고 금호강 백사장 조개잡이 했었지…
◆나무에 새긴 맹세
뒷동산에서의 맹세를
나는 나무와 돌
어디에 적을까 생각했다
나는 돌과 나무 중
나무에 새겨 두었다
지워질지 몰라도
그 맹세는 나무와 함께
자랄 것이라 생각되어서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맹세 불현듯 생각나
뒷동산의 나무를 찾았지
글씨는 높아지고 흐려져
그 내용 알 수 없었지
그 맹세의 말 알 수 없어도
해마다 나는 그 나무를 찾는다네
꿈처럼 자란 그 나무를
내가 쓴 이 시의 무대는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이다. 이 시뿐 아니라 나의 수필과 시의 대부분 무대가 고향인 서재리이고, 지금도 밤마다 꾸는 꿈의 무대는 어김없이 고향인 서재리이다.
지금은 대구 시내에 살고 있지만, 고향인 서재리와의 거리가 수㎞ 밖에 되지 않기에 명절이나 운동회, 구강검진, 장학금 수여 등의 목적으로 자주 방문하며 현재도 서재초등학교 총동창회 회장으로서 5년째 일하고 있다.
대구에서 달구벌 대로를 따라 곧장 서쪽으로 가면 성서의 계명대가 나오고, 계대 동편 큰길을 따라 신당고개를 넘으면 소쿠리 같은 아담한 고을이 나오는데 그곳이 서재리이다. 또, 서울방면으로 기차를 타고 지천역에 도착하기 전 금호강 철교를 건널 때 좌측에 보이는 뾰족한 산이 와룡산 용머리이며, 많은 아파트 숲이 보이는데 그곳이 서재리이다.
지금은 인구 1만7천 명을 자랑하는 서재리가 되었지만 40년 전까지만 해도 윗마을 50가구는 경주 이씨의 집성촌이었고, 아랫마을 40여 가구는 성주 도씨 집성촌이었는데 나는 서재 2동인 윗마을에 살았다. 경주에 본적을 둔 시조 이알평의 자손인 국당공(이명박 대통령도 국당공파이다)의 고손인 이재(호는 월파)가 세종 14년에 예조판서에 제수되고 단종 폐위로 인하여 관직을 버리고 대구부 하동면(지금의 다사읍)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후손이 사헌부 지평 등 여러 벼슬을 하고 증직으로 형조참판, 공조참의 등을 지내면서 조상을 숭배하고 거룩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석림정사, 용암재, 은덕재 등 삼재사를 지어 미풍양속, 선조숭앙과 예의를 중시했던 58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동남쪽은 와룡산, 서쪽은 굴미산으로 병풍을 둘렀으며 북쪽은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지관은 서재의 지형을 보고 음과 양이 잘 조화되어 있어서 선하고 어진 사람들이 배출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와룡산
와룡산은 옛기록에는 성산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용이 누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의 분지가 형성될 때 팔공산이나 비슬산 등 주위의 산은 지세가 대구의 분지를 향하여 뻗어 있으나 오직 와룡산만은 등을 대구로 향하여 돌아누워 있는 형상을 보이므로 역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 장군이 명산의 맥을 잘랐는데 와룡산 맥을 자르니 붉은 피가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용머리 부분인 와룡산 꼭대기에 무덤을 쓰면 그 묘 주인은 부자가 되지만 그 일대에는 무덤이 있는 한 가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가뭄만 닥치면 주민들은 와룡산에 올라가 무덤을 파내고 화장을 해왔는데 일제 말엽에도 가뭄이 아주 심해 농민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 이상한 곳에서 무덤을 파내었더니 큰 비가 왔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 가뭄이 들 때면 동네 사람들이 와룡산에 올라가 깡철이를 잡는다고 꽹과리를 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것을 보아왔다.
이외에도 와룡산에는 병풍바위, 비룡바위, 원한바위, 까들락바위, 장군정 등에 얽힌 전설도 많다. 와룡산은 그 높이가 300m에 불과하지만 산에 얽힌 전설이 그리도 많은 것을 보면 명산임에는 틀림없다.
용머리가 누워있는 서재뒷산과 용의 다리쯤에 해당되는 대구쪽의 와룡산 사이의 계곡에 인구 100호가 사는 방천 1동과 2동이 있었는데, 1990년부터 대구의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용의 품속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생각하면 고향의 산(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인간의 이런저런 행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와룡산은 상서로운 기운을 뿜으며 거기 그 자리에 서서 우리들을 안아주고 있다. 아침이면 신선한 푸르름으로, 낮이면 아득한 그리움으로, 저녁이면 엄격한 감시자로서 거기에 항상 그처럼 자신있게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와룡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을 따라 마을 앞 논밭과 사래 긴 갯밭을 지나면 굽이굽이 흐르는 금호강의 넓은 백사장이 나온다.
◇금호강
나는 어릴 때 노닐었던 그 금호강을 잊지 못한다. 항상 물은 찰랑거리며 모래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강가의 물기를 가득 머금은 모래밭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나 있는데 그 작은 구멍마다 조개가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이면 한 되를 주울 수 있었다.
강가 작은 바위틈에 다슬기가 붙어 있었고 작은 새우가 뛰어다녔다. 강변의 모래는 끝없이 넓었으며 봄에는 항상 아지랑이가 숨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봄이, 개나리나 진달래꽃이나 나무의 잎새에서 온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봄은 제일 먼저 강가에서 온다. 꽃들이나 잎들이 아직 봄의 소식을 모르고 늦겨울 잠을 잘 때 제일 먼저 강가의 백사장에서 아지랑이가 봄을 알려준다.
음력설이 지나고 삼월이면 강가에 있는 사래가 긴 보리밭을 매러 간다. 물기 짙은 갯밭에는 금색 잡초 촉새가 우거진다.
오전에는 아직도 매서운 산바람이 후진국의 관리처럼 나를 괴롭혔지만 오후가 되면 산바람이 강바람에 밀려서 도망을 간다. 마치 민중에 의해서 독재정부가 도망가는 것처럼.
나는 그 바람의 진원지를 따라 강가로 뛰어간다, 모래밭에 벌렁 누워서 물새들을 보노라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배가 고파서 헛것을 본 것인가?'하고 의심하면서 자세히 보면 아지랑이가 더욱 또렷이 보인다.
날이 좀 가물어지면 강물은 좀 더 좁게 흐르고 강은 이빨을 드러내어 웃듯 넓은 백사장을 가지게 된다. 작은 모래섬들이 있는 주위에는 작은 연못처럼 아직도 물이 얕게 고여 있었는데 많은 고기들이 갇혀 있었다. 우리는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모래가 보드라운 깊은 물에는 대합조개가 있어 우리들은 잠수를 하곤 했다. 강이 급류가 되어 산기슭을 할퀸 강가에는 돌이 많이 있는데 애들은 돌을 들추며 다슬기, 새우를 잡았고 어른들은 낚시를 했다.
홍수가 지나간 강기슭에는 영양분이 잔뜩 들어있는 부드러운 흙이 퇴적되는데 무성하게 풀이 돋아나 있어 매일 소를 먹이러 강기슭으로 간다. 넓은 강기슭은 끝없이 완만한 풀밭이 펼쳐져 있어 소 타기에 참으로 좋다. 강기슭 밖에는 버드나무 숲이 있었고 그 밖에는 밤나무 숲이 있었다. 또 그 밖에는 큰 사과밭들이 있었다.
일년에 한두 번 홍수가 날 때면 물이 바다 되어 장관을 이루는데 돼지와 목재들이 떠내려가고, 수많은 사과가 떠내려와서 물위에 뜬다. 뱀들이 물가로 헤엄쳐 나오면 우리들은 막대기로 두들겨 뱀을 잡았다.
강은 우리 시민들에게는 단백질의 보고요, 농업용수의 근원이었으며 우리의 놀이터였다. 봄이면 버드나무 숲에 아이들은 소풍을 가고 어른들은 농악을 울리며 회추를 했다. 여름이면 깊은 물에서는 멱을 감으며 뱀장어를 잡았다. 얕은 물에서는 어른들은 줄낚시를 매어놓고 송어나 피라미를 잡았고 아이들은 걸어다니며 모래무지를 잡았다. 얕은 강물이 흐르는 모래 위를 걸어다니면 발바닥 밑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는데 이때 발의 간지러움을 참으며 꼬옥 밟고 손으로 고기를 잡으면 된다.
가을이면 강물이 더욱 조용해지고 곱게 흐르는데 겨울에 얼음을 얼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매서운 북풍이 와룡산 시이(지명) 모퉁이를 휘몰아치면 강물이 단박에 얼어붙어 석달 동안 빙판을 형성한다. 이때는 나룻배도 없어지고 우리는 팽이를 돌리거나 스케이트를 탄다. 강을 덮은 얼음도 장관이지만 얼음 위의 흰눈이 덮이면 더욱 장관이다. 거기에 달빛이 비치고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더 이상 강을 찾지 않는다.
◇영원한 마음의 고향
제방 둑을 더 많은 경작지를 위하여 강 안쪽으로 쌓아서 백사장이나 묵전이 없어졌고 밤숲과 사과 과수원도 거의 없어졌다. 1960년대 이후로 갑자기 불어닥친 산업화의 물결로 강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는데 1990년대부터 강이 정화되기 시작했고 여름밤 강둑에는 환경의 척후병이라 할 수 있는 무수한 반딧불이가 살고 있다. 4대강 정비사업이 더욱 진행되면 훨씬 좋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고향이 지금처럼 개발되지 않고 옛날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았겠다는 욕심도 들지만 어디 세상일이 내 뜻대로만 되겠는가? 그래도 와룡산과 금호강이 그대로 있기에 서재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있다.
댓글 많은 뉴스
경북대 '반한집회'에 뒷문 진입한 한동훈…"정치 참 어렵다"
한동훈, 조기대선 실시되면 "차기 대선은 보수가 가장 이기기 쉬운 선거될 것"
유승민 "박근혜와 오해 풀고싶어…'배신자 프레임' 동의 안 해"
"尹 만세"…유인물 뿌리고 분신한 尹 대통령 지지자, 숨져
법학자들 "내란죄 불분명…국민 납득 가능한 판결문 나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