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한 끼의 식사 '최고의 만찬'
생애 중 한 끼의 식사는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한 끼 먹어도 그만, 굶어도 그만'이란 옛말은 가난이 삶을 지배하던 시절에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다. 한 끼를 건너뛰면 놓친 그 한 끼는 영원히 찾아 먹을 수 없다. 배탈이 나 한 끼를 굶어야 할 때와 수술 직전에 속을 비워야 할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로 끼니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
한 끼의 식사는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나는 밥상 앞에 앉으면 경건해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충일해진다. 아무리 귀찮고 바쁘더라도 식은 밥을 멀리 하며 국과 찌개는 방금 끓인 것만을 고집한다. 동물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인간만이 익힌 음식을 먹는다. 그건 차고 따뜻함이 문제가 아니라 온기가 전해주는 정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예식장에서의 식사를 싫어한다. 음식에 정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음식을 먹느니 뜨끈한 국밥이나 칼국수 한 그릇 먹는 게 낫다. 한 끼의 식사에 대한 내 나름의 경의 표시인 셈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식사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여긴 온기는 있되 정성이 없고 조리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으니 맛이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지난여름 강릉에서 열리는 문학행사에 참가하는 회원들이 세 대의 차량을 나눠 타고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다 횡성휴게소에 이르렀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총무가 식사 주문을 받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한 끼의 식사'에 대한 종교 같은 신념이 불끈 고개를 쳐들었다. "여기서 20~30분만 더 달려 횡계IC에 내리면 아주 맛있는 식당이 있어요. 걸로 가요."
우린 명태 덕장으로 유명한 횡계의 납작식당(033-335-5477)을 찾아갔다. 이 집은 싱싱한 오징어와 삼겹살을 주물러 내는 오삼불고기로 아주 유명한 집이다. '은근하고 소박하게 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이 식당은 200g에 1만2천원 수준이니 가격도 착한 편이다. 일행들은 자칫 별맛 없는 우동으로 한 끼의 식사를 때울 뻔한 위기를 낯선 음식인 오삼불고기로 채우더니 모두의 얼굴빛이 환하게 밝아졌다.
지난 한 해 동안 서너 차례 강릉을 오르내리면서 여행 음식에 대한 감회를 이 난을 통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연재 글을 읽은 주문진 어시장에서 우보회집(033-662-8755)을 경영하는 매일신문 20년 독자 최광국 씨가 메일을 보내왔다. 군위 우보가 고향인 최 씨는 낯설고 물 선 주문진에 정착하기까지 꽤나 고생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이젠 중매인 자격을 얻어 제법 살만하다"며 내왕하는 걸음이 있으면 꼭 한 번 들러달라고 했다. 건성으로 하는 인사치레는 아니었다.
대구에서 강릉까지 같은 승용차를 타고 갔던 우리 팀은 행사가 끝난 후 주문진으로 달려갔다. 자연산 생선회를 떡 벌어지게 한 상 차려놓고 내외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행사장에서 제공하는 식판 배식을 용케 피해 나온 걸 자축하며 주문진 생 막걸리를 위장이 서늘하도록 거푸 들이켰다.
오랜만에 '고향 까마귀'니 '경상도 문디이'라는 거의 잊혀가는 말들이 새삼스러운 저녁이었다. 옛날 서라벌 사람들은 한가위 날에는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고 했듯이 우리도 "대구에서의 내일이 오늘만 같아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주문진에서의 한 끼 식사는 정말 근사했다.
다음날, 두타산 밑 삼화사 무릉계곡에 들러 조선의 명필 양사언이 쓴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란 대필 글씨를 보았다. 또 매월당 김시습이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 일필휘지로 갈겨 쓴 글씨와 선비들의 취흥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음각 글씨들을 두루 구경한 후 대구로 내려왔다.
집에 돌아오니 '사평역에서'란 시를 쓴 곽재구 시인이 인도 산티니케탄에서 보낸 540일의 기록을 담은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이란 산문집이 책상 위에 얹혀 있었다. 시인은 섬광처럼 지나가는 소중한 1초의 기억들을 시가 아닌 투명한 산문의 탑으로 쌓아두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한 끼의 식사'나 '1초의 기억'이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짓으로 주고받은 수화(手話)인 셈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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