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박천홍 /현실문화

입력 2011-09-01 14:00:44

백성들은 호기심과 공포…지배층은 회피에 급급

"조선 왕조를 비추던 태양이 서산으로 기울어갈 무렵, 조선의 바다에는 정체불명의 배들이 활주하고 있었다. 집채같이 거대한 배에서는 조선인들이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들은 종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난바다를…. 신출귀몰하며 조선의 수군과 어민들의 넋을 놓게 했다."

박천홍의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를 읽었다. 조선 말 조선의 바다를 활보하던 이방의 배들과 그들이 목격한 조선인들의 모습, 이방인들을 맞아 당황스러워하는 조선 내부의 모습을 사뭇 정치하게 그린 책이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조선과 조선인은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야만적이고 잔인한 백성이 사는 공포의 섬, 혹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으며 괴상한 모자를 쓴 민족이 사는 곳으로, 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조선의 관리들은 고급스러운 차림에 지적이고 호감을 주는 풍모를 하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해충이 득실대는 불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당시 정부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호기심과 공포라는 양가적 감정을 갖고 대했다. 왜가리처럼 시끄럽게 지절대고 어지러운 실 같은 글씨를 쓰는 오랑캐들의 일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썼다.

이방의 땅에 도착한 탐험가들이 맨 처음 한 일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붙인 이름을 무시하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주도를 '켈파트'로, 울릉도를 '다즐레'로, 서해안의 섬들을 '제임스 홀 군도'로 이름 붙였다. 영토를 측량하고 지명을 지도에 기입하였으며, 동식물의 생태와 광물 자원을 조사하여 자신들의 나라로 가져갔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55년 10월 19일 인도차이나 함대사령관 게렝 제독에게 긴급 지령을 내렸다. 내용은 앞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과 기회를 조사,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게렝은 그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분열되고 무력한 나라, 관리들이 군함 한 척 앞에서 떨거나 달아날 줄밖에 모르는 이런 나라는, 처음으로 이 나라를 점령하려고 생각하는 유럽 열강의 야심에 희생될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썼다.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러시아, 미국이 조선의 바다에 출몰하였다. 이방인들의 선박이 출몰하는 횟수는 점점 잦아졌고, 그들의 방문은 더욱 노골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협박하고 가축을 탈취했으며, 각 섬에 무상하게 출몰하여 포를 쏘고 섬의 여인들을 겁탈하려 했다.

바다를 통한 외부 세계의 출몰은 당시 조선 정부와 일반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악령'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 세계의 침입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 정부의 서로 다른 대응은 이후 각 나라의 운명을 전혀 다른 모양으로 결정짓게 된다.

압도적인 화력과 빈틈없는 상업정신, 그리고 과학기술로 뒷받침된 합리주의 철학 등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패권 앞에서 중국은 반식민지로 강등되었고, 조선은 '꼬마' 서양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유일하게 일본만은 예외였다. '쇄국'에서 '개국'으로 숨 가쁘게 몰아치는 역사적 격랑에서 난파당하지 않고 오히려 재빠른 변신을 거듭하며 열강을 따라잡아 갔다.

비슷한 조건이었으되 세 나라의 운명을 가른 요인에 대해 저자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관념의 세계에 안주하여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제국들이 교역과 선교를 요구했을 때 회피하는데만 급급했던 것을 지적한다. 저자는 지배층과 양반 지식층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를 생존의 터전으로 삼고 일상의 노동에 충실했던 민중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근대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과 개방적 태도에서 훨씬 역동적이고 중층적인 근대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의 저자이기도 한 박천홍의 책에서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한 조선 말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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