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⑧김원중 시인의 안동 남후

입력 2011-08-20 07:58:48

강물이 넘칠땐 산 절벽길 오르고 기차 철교를 건너 '집념의 등교'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미천. 왕복 30리도 넘는 그때 그 등굣길을 다시 찾았다. 물이 불어나 외나무다리가 잠기는 날엔 저 멀리 강변을 둘러친 산 절벽 토끼길을 따라 어떻게 등교했는지 되돌아보니 가슴이 저민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미천. 왕복 30리도 넘는 그때 그 등굣길을 다시 찾았다. 물이 불어나 외나무다리가 잠기는 날엔 저 멀리 강변을 둘러친 산 절벽 토끼길을 따라 어떻게 등교했는지 되돌아보니 가슴이 저민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63년 만에 다시 찾은 남후초등학교. 교정에는 그때 그 플라타너스 나무가 말없이 나를 반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63년 만에 다시 찾은 남후초등학교. 교정에는 그때 그 플라타너스 나무가 말없이 나를 반긴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김원중
김원중

파란만장한 내 인생은 안동 남후면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의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슬픔과 외로움만이 가득 찼던 어린 시절이었다. 안동 남후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는 졸지에 어머니와 여동생 셋을 거느린 열두 살짜리 소년가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당장 주거지부터 옮겨야 했다. 남후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무릉리 셋집에서 검암리 대실마을 본집으로 이사하였다. 나의 고생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니 우리 집이 있는 검암리 대실마을에서 무릉리 학교까지 왕복 30리도 더 되는 먼 거리였다. 요즘처럼 잘 닦여진 아스팔트길도 아니고 대실마을 앞 강을 건너다녀야 하고 검암들의 논둑길을 따라 계곡리까지 가야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리고 학교 앞의 냇물을 건너야 비로소 학교가 나온다. 나는 이 냇물까지 맨발로 다녔다. 냇물에 발을 씻고서야 들고 온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들어갔다. 이 30리 등하굣길을 책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검정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1년 동안 걸어서 다녔던 것이다. 아니 뛰어다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검암들 논둑길을 뛰어가다 보면 뱀도 만났고 개구리도 만났다. 요즘처럼 장마철이면 아침에 건넜던 마을 앞 강물이 불어서 저녁 하굣길에는 건널 수 없을 정도였다. 참으로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 그때 한 친구가 강 언덕 버드나무에 매어둔 소를 가리키며 "소 타고 가자"고 하였다. 소는 시간만 나면 강 언덕의 풀을 뜯어 먹게 하던 시절이라 비가 많이 오면 나무에 묶어두고 집에 쉬러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 집 소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나무에 묶어둔 소를 한 마리씩 풀어서 옷을 벗어 소뿔에 휘감아 묶고 소꼬리를 꽉 붙잡고 강을 건넜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에든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내가 제일 먼저 소를 몰고 강에 들어가면 다른 친구들도 소꼬리를 잡고 강을 건너갔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듯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소꼬리를 잡고 강을 건너 집에 갔던 일을 가끔 떠올릴 때가 있다.

또 하나 대실마을 앞 강은 낙동강 지류이지만 한 1㎞쯤 강 상류로 올라가면 풍산들이 바라보이는 낙동강이 나온다. 장마철이 지나면 잉어떼들이 이 낙동강에서 활개를 친다. 친구들과 나는 낫 한 자루씩 들고 잉어를 잡으려고 강물에 뛰어들어갔다. 친구들은 낫으로 잉어를 잘 잡는데 나는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잉어들을 향해 낫을 힘껏 내리쳤는데 잉어는 어느새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그뿐인가. 잉어가 달아나면서 내 뺨을 한 대 철썩 갈기고 달아나 버린 일도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거리이다.

내가 6학년 졸업반이라 늦게까지 학교에서 수업 마치고 집에 오면 어두컴컴한 밤이 된다. 마을 앞 강을 건너면 어머니가 언제부터 와 계셨는지 저만치 홀로 서서 마중 나와 계셨다. 이때의 모자간 만남은 먼 훗날은 물론 지금도 나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안되겠다 싶어서인지 무릉리에 살았던 셋집으로 다시 이사를 하였다. 순전히 우리 남매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검암리에서 남후초등학교에 다녔던 시기는 일 년이 채 안 된다.

남후초등학교의 졸업식은 '울음식'이었다. 몇몇만이 안동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고 대부분 아이들은 초등학교가 마지막 학벌이기에 서로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1949년 8월 어느 날, 남후초등학교 졸업식을 얼마 앞둔 이른 새벽, 나는 무릉역에서 안동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안동에 있는 중학교로 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그때는 9월 입학이었고 중학교는 6년제였다. 내가 안동행 기차 안에서 혼자 느꼈던 뼈저린 외로움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나는 혼자구나' 하는 외로움! "아버지가 없이 자란 사람은 외로움을 잘 느끼고 어머니가 없이 자란 사람은 슬픔을 잘 느낀다"는 말을 심리학에서 본 적이 있듯이 나는 평생 이 외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금껏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입학했던 학교가 안동농림중학교 임과였다. 농과와 임과, 축산과 세 개 학과 중 임과에 입학한 것은 아버지의 만년의 꿈이 과수원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안동농림중학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유일한 명문학교였다. 그러나 나는 이 중학생 생활을 일 년도 안 돼서 끝내야 했다. 입학식날까지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서 교장실로 불려가 울기만 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 떨쳐버리지 못한 사연으로 남아있다. 지난해 손자의 중학교 입학식에서 행복해하는 손자의 모습을 보니 60여 년 전의 내 입학식 광경이 떠올라 학교 체육관에 가서 혼자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런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는 아들을 무조건 공부시켜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고 입학 등록금을 입학식날까지도 장만하지 못하셨다.

두 분의 숙부님은 조카의 중학교 입학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한 분은 무관심으로 일관하셨고, 한 분은 중학교 갈 돈이 있으면 그 돈 당신에게 달라고 무기력한 형수(어머니)에게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결국 친정(안동 권씨)에 가서 빌려다가 입학등록금을 늦게나마 내주셨다. 이리하여 대실마을이 생긴 이래 나는 최초로 중학생이 된 것이다. 마을의 이웃들은 잘되었다고 축하해 주는데 유독 두 분의 숙부와 숙모만이 못마땅해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학기 때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친정에 가서 돈을 빌리셨다. 아무리 친정이지만 돈을 빌리기만 하고 갚지를 않으니 2학년 때 친척 한 분이 학교에 찾아와서 빌린 돈을 안 갚는다고 야단치며 하굣길의 나를 불러다 혼을 낸 일까지 생겼다.

먼 훗날 내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외사촌 형님 한 분이 몹쓸 병으로 경북대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문병갔더니 내 손을 붙잡고 "안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못 도와준 것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친가에서 공부 못 시켜주면 외가에서 시켜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내가 약값으로 드린 약간의 위로금을 돌아가실 때까지 쓰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처럼 어렵게 중학생이 된 기쁨도 일 년뿐, 그 이듬해인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안동에서의 나의 중학생 생활도 중단됐다.

안동농림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입학 시기가 개정되어 1950년부터 9월 입학이 4월 입학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나는 1949년 9월에 입학하였고, 1950년 4월에 2학년이 된 것이다. 2학년이 된 지 두 달 만에 6'25전쟁으로 나의 학업은 중단된 것이다.

6'25전쟁 때 우리 가족들은 청도군 매전면까지 피란을 갔었다. 중학교에 복학할 형편이 안 되니까 그 대신 취직의 길을 택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 어머니의 주선으로 모교인 남후초등학교에 급사(사환)로 취직한 것이다. 이때가 우리 가족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말단 급사였지만 공무원이어서 정상적인 월급을 받았고, 때로는 쌀 한 가마니의 보너스까지 받았으니 먹고살기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침 일찍 학교로 출근하면 청소하고, 시간마다 수업을 알리는 종을 쳤다.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는 등 참으로 바쁜 직장생활을 하였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자리가 엄청나게 컸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갈 때 나도 같이 가고 싶어서 따라갔더니 아버지가 "공부는 안 하고 위험한 짓을 한다"고 야단치신 적이 있었다. 나는 가끔 주변 친구들이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았다는 말을 들으면 나도 야단치시는 아버지가 계셨으면 하고 부러운 눈으로 친구들을 쳐다보곤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오르간이 놓여 있는 교실에 들어가 오르간을 쳤다. 물론 혼자서 악보를 보고 익혔다. 그때 얼마나 열심히 오르간을 쳤던지 '이별의 노래' '졸업의 노래' 등 어지간한 곡은 다 칠 줄 알았다. 그때는 피아노가 없던 시절이라 오르간을 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하루는 정신없이 오르간을 치고 있는데 교실 창 밖으로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내가 오르간을 치는 모습을 보고 노래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대실마을 앞 강물이 불어 등교할 수 없게 되면 나는 강 이쪽 산의 절벽길을 따라서 무릉리의 기차 철교를 건너서 학교에 가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학교 가기를 포기해도 나는 그 험한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한 가지 집념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무서움을 이겨내고 다녔을까? 문득 남후초등학교 때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공부 제일 잘했던 서영수, 무릉역장 아들인 김택정은 내가 검암리로 이사 가서 힘들게 통학하는 걸 안타까워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같이 자기도 했다. 무릉리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 권혁동, 가장 먼저 죽었는데 죽기 전 나를 몹시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올해 봄, 나와 앞뒤에 앉아서 공부했던 친구 서윤식에게 전화를 했더니 안동에 오면 만나자고 해서 몇 달 뒤 안동 가는 길이 있어서 전화했더니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했다. 남후면장도 하고 평생을 남후면사무소에서만 근무한 친구였는데…. 또 얼마 전 남선면에서 남후초등학교에 다니던 권삼석이라는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투병 중이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생존하고 있는 친구가 몇이나 있는지 참으로 그리워진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고 추억을 먹고 살아갈 수밖에….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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