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도동서원 은행나무

입력 2011-08-18 14:12:46

# 대구정신의 뿌리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한강 정구 선생을 일러 "영남 상·하도 학문을 도산(陶山)과 덕천(德川) 두 사문(師門)으로부터 흡수 소화하여 자기를 대성시킨 분이다.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涵養)을 가했다"고 했다. 즉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방법은 퇴계를 닮고,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남명을 닮았다는 뜻일 것이다.

1501년(연산군 7년) 영남지역에는 공교롭게도 두 거인이 탄생해 각기 학파를 형성한다. 조식(曺植·1501~1572)의 남명학파와 이황(李滉·1501~1570)의 퇴계학파다. 그러나 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한강은 이들 계파를 아우르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수립했다. 특히 퇴계학을 근기(近畿)지방까지 확산시키고 남인 예학을 확립시켰으며 더 나아가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잉태 시키는 고리 역할을 했다.

그는 1543년(중종 38년) 성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정응상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이런 연유로 선생의 아버지 정사중은 한때 현풍 솔례로 옮겨와서 살기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슬픔을 맞았지만 당시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종이모부인 오건(吳健)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1세에는 퇴계, 24세에는 남명 양문의 문도가 되었다. 나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다가 1579년(선조 12년)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나아가 그 후 강원도관찰사·충주목사·안동대도호부사·형조참판·대사헌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대구의 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서거정 선생이 문형(文衡)을 맡는 등 한강 이전 대구에 출중한 유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찍 상경한 관계로 후학을 기르지 못했다. 따라서 대구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는 이른바 한강학맥이 대구의 공론을 주도했다.

곽재겸·송원기·서사원·손처눌·정광천·손처약·채몽현·손린·채선수·이윤우·채선길·곽주·유시번·도성유·이문우·박수춘·도응유·최무·도여유·채선견·정기·채선근·도언유·서사선·최동율·최동집·박종우·도경유·도신수·도신징·이도장·최흥국·서시립 등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으로 대구가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을 때 서사원과 손처눌이 주도하는 의병에 참가하여 국난극복을 주도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도신징은 제2차 예송논쟁에서 상소를 올려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을 실각하게 하는 등 당시 집권층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인들의 본거지인 대구에 서인(西人)의 거두 이숙(1626~1688)을 기리는 상덕사(尙德祠)가 건립되는 등 서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이러한 상황은 영남의 다른 지역과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대구의 사림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한강의 개방적인 사상을 이어받은 대구 사림들이 서인을 배척하지 아니하고 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이 만년을 보내다가 돌아가신 곳도 대구이다. 처음 팔거현 노곡(현 칠곡군 지천면 신리)으로 이주했다가 화재를 만나 그동안 써 두었던 많은 책을 잃고 다시 옮긴 곳이 대구의 사빈(泗濱) 즉 오늘날 북구 사수동이다. 사양서당(泗陽書堂)을 지어 다시 저술에 몰두하다가 1620년(광해군 12년)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저서로 '오선생예절분류''심경발휘''고금충모''의안집방''함주지' 등이 있으며 성주의 회연서원, 충주의 운곡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외증조부인 한훤당 선생을 받드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 흩어진 행장(行狀)을 수습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서원 재건에도 앞장섰다.

1607년(선조 40년) 사액이 내려오자 서원 앞에 한 그루 은행나무를 심어 뜻 깊은 일을 오래 기리고자 했다. 대구가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국채보상운동과 2·28의거를 통해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 소임을 다한 배경에는 한강정신이 뒷받침했다고 할 수 있다.

도동서원(사적 제488호)은 동방 오현의 수현(首賢)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중기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강당·사당, 장원(牆垣)이 보물(제350호)로 지정된 곳이다. 그가 성리학을 공부하든, 건축을 공부하든, 조경을 공부하든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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