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우시장에 누렁이 팔고 탁배기 한사발로 섭섭함 달래며…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고, 그 흔적인 발자국을 남겼다. 산과 숲, 계곡을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국이 차곡차곡 쌓여 길이 생겼다. 이 길을 통해 사람들이 통행을 하고 소통을 하며, 물품이 이동을 했다.
경산 환성산 감투봉 능선을 따라 초례봉으로 향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 갑작스레 낮아진 곳에 위치한 새미기재(해발 540m). 이 새미기재는 서남쪽으로는 대구 평광동'도동'불로동 등이, 동남쪽으로는 경산 하양읍 대곡리를 연결하는 길목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대구 사람들은 하양 5일장을, 하양 사람들은 대구 불로장을 보기 위해서 이 고개로 나 있던 옛길을 다녔야만 했다. 하지만 대구∼안심∼하양∼영천 간 도로가 나고 이들 산골 마을에도 버스 등 대중교통이 다니면서 민초들의 애환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했던 그 옛길은 이제 등산객들과 산악용 자전거를 타는 참살이족(族)들의 레포츠 '통로'로 그 역할을 넘겨 주었다.
◆소들은 새미기재를 넘어 하양우시장에 모이고
하양장도 전에는 4, 9일 5일장이 섰으나 현재는 상설 전통시장 형태로 남아 있다. 하양장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 주변에서는 제법 큰 장이었다. 특히 금락교 건너편에는 제법 큰 우시장이 섰다. 인근 대구와 영천, 청통, 대창, 경산 등지에서도 소를 팔거나 구입하기 위해 이곳 우시장을 찾았다. 대구 불로동'도동'평광동 사람들이 하양 우시장을 찾기 위해 지름길인 새미기재를 통해 넘나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트럭에 소를 싣고 우시장에 내다 팔지만 예전에는 소를 직접 몰아 우시장에 내다 팔거나 사서 집으로 몰고 갔다.
유상진(63'하양읍) 씨는 소중개상을 하던 외할아버지의 지시로 18세 때부터 수년간 하양과 대구 우시장에서 소를 몰고 새미기재를 수없이 넘었다. 그는 "당시만 해도 하루 일당을 받고 소를 몰아다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소를 몰 때는 한 마리씩 몰면 품이 많이 드니까 코뚜레를 낀 소 3, 4마리를 서로 끈으로 묶어 연결하고 맨 뒤에 있는 소 등에 타고 채찍을 가하면 좁은 산길이라도 힘이 덜들게 빨리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최재림 하양향교 전교는 "예전에는 하양우시장 주변에 소들을 재워 주는 '소 여관'이라고 할 수 있는 마굿간들이 있었다"면서 "먼 길을 소 몰고 온 사람들이 새벽 우시장에서 소를 내다 팔거나 새로 구입한 송아지를 몰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과 소가 함께 숙박을 했었다"고 말했다.
하양우시장이 1990년대 진량으로 옮기면서 우시장 터는 방치하다시피 하다 최근 들어 하양공설시장 현대화사업에 따라 장옥을 철거하면서 임시시장이 들어서 있다. 이제 노점상은 보부상의 봇짐과 등짐 대신에 트럭에 짐을 싣고 포장도로를 달릴 뿐 옛길은 다닐 수도 없다. 이 동네 저 동네 빠르게 누벼도 불경기로 주름만 늘어나고 신명이 사라진 지 오래다. 예전의 떠들썩하고 정을 나눴던 5일장의 모습은 아스라이 먼 옛 이야기가 된 듯하다.
◆새미기재 아래 마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옛 하양우시장을 뒤로 하고 조산천을 따라 도리리~서사리~대곡리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대곡리를 향했다.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닦았을 시멘트 포장도로를 4㎞ 정도 달렸을까. 아랫한실(대곡1리)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름이 말해주듯 큰 골이라는 이름의 대곡리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 쉼터에서 땀을 식히던 박종만(66) 씨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는 물론 하양읍과 심지어 20리 이상 떨어진 진량에서도 이곳 대곡리로 나무나 갈비(솔가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들어오는 바람에 동네 앞 좁은 길을 지나다니기 힘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 마을 권삼봉(62) 씨는 "30여 년 전만 해도 마을 앞 좁은 길로 대구 평광동 쪽에서 새미기재를 넘어 하양우시장에 소 팔러 온 사람들이 다시 소를 구입해 재를 넘던 사람들이 많았다"면서 "소를 몰고 가다 목이 마르고 허기가 지면 동네 구판장에서 소를 매어 놓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매를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이 같은 연유로 해서 평광동과 대곡리 간에 사돈이 많다고 한다.
길을 따라 1㎞ 정도 더 올라가니 대곡2리 윗한실마을이 나왔다. 이 동네는 곧게 뻗은 소나무 아래 정자쉼터가 있어 마을 할머니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손자'손녀 자랑 등 살아가는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동네 안 돌담길은 정겹다 못해 제주의 어느 돌담집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마을 어른신들의 이야기에도 새미기재는 빠지지 않은 옛 추억의 길이었다.
17세 때 영천 고경에서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는 황점례(85) 할머니는 "예전에는 아침 일찍 새미기재를 넘어 하양장으로 소를 몰고 가거나 나뭇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가끔씩 붓 장수와 소금 장수, 새우젓 장수들이 산골 마을까지 와서 필요한 물건을 팔고 돈 대신 곡식을 받아 갔다"면서 "이들이 다녔던 옛길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숲이 우거지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했다.
새마을지도자로 13년 동안 봉사하던 중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표창까지 수상했다는 허성렬(84) 할아버지는 "대구 평광동이나 하양 대곡리에 요즘처럼 도로가 뚫리고 차량들이 많이 다니기 20년 전 쯤까지만 해도 대구 불로동을 가려면 하양읍내와 안심을 통해 가기보다는 새미기재를 넘어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면서 "예전에는 재 중간에 소 도적들도 있어 소를 잃었다는 소문들이 자주 나 몇 명이 어울려 다녔던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구 평광동 시랑이마을 김말순(77)'김계화(73) 할머니는 "남편을 따라 나무를 이고 지고 새미기재를 넘어 하양장에 내다 팔아 보리쌀이나 어물 한두 마리, 반찬거리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종일 걸렸다"고 회상했다.
하양 대곡리나 평광동에서 새미기재로 올라가는 옛길은 어디로 길이 났었는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몇 해 전에 임도가 나면서 이제는 차 한 대 다닐 정도의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다. 대곡리 쪽에는 재 정상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다. 쉽게 갈 수 있어 편리해졌으나 옛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그 길을 통해 지나간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옛길은 레포츠 통로로 변해
새미기재 정상에서 대구 평광동 쪽을 보면 준령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듯 웅장하다.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이 펑 뚫린 듯 시원하다. 구름도 재 양쪽 높은 산을 넘기가 힘든 듯 산에 걸려 쉬어 가고 있다. 재 정상에는 새미기재라고 붓글씨로 쓰여진 나무안내판과 대구 불로동과 하양 대곡리를 알리는 안내판이 길손들을 반기는 듯 서 있다. 대구 동구청에서는 이 재 남쪽으로 등산로를 정비하고 있다.
새미기재 정상에는 요즘 등산객뿐만 아니라 산악용 자전거(MTB)를 타고 대구 시내에서 평광동을 경유하거나 하양읍내에서 대곡리를 거쳐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MTB를 탄 지 3년이 됐다는 김창호(48'하양읍) 씨는 "집에서 환성사를 거쳐 새미기재에서 도착해 초례봉 또는 평광동과 능성재를 돌아 하양 집으로 돌아가는 코스가 너무나 좋아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대구 도동 집에서 출발해 평광동 버스 종점∼시랑이∼새미기재 정상까지 코스를 1주일에 4번 정도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올랐다가 내려간다는 김봉가(50) 씨는 "오르막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오면 운동 효과가 뛰어나고 계절마다 바뀌는 풍광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반했다"면서 "최근 들어 산악용 자전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 코스가 호젓하면서도 운동효과도 뛰어나 각광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재 정상에서 평광동으로 내려가는 임도가 잘 정비돼 있다. 임도 옆 계곡에는 차디찬 맑은 시냇물이 소리 내어 합창을 하고, 수많은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친구, 연인, 등산객들이 평광동에서 새미기재 임도를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어떤 이는 하늘에 천당이 있으면 대구에는 평광이 있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삼국 시대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병사복장으로 해 시랑리에 숨어들었으나 군사들이 왕건을 찾지 못하고 잃은 곳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 실왕리(시랑리)이다. 쪽박골, 새미골, 옥송골, 큰논골 등 골골마다 아름다운 지명이 소박하고 너무도 맛깔스럽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를 몰고 다니거나 생필품을 지고 이고 다니던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던 옛길. 옛길은 이제 자신의 생명을 다하고 등산객들이나 산악용 자전거를 타는 참살이족(族)들의 레포츠 '통로'로 그 역할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길 또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또 다른 역할을 자연스럽게 모색할 것이다.
글'사진 경산'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