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중년

입력 2011-08-01 07:15:25

업무 연락을 위해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수화기에서 다시 번호를 눌러 달라는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호를 늦게 눌렀나 싶어 손가락에 속도를 붙여 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는 좀 전의 그 음성이 또 귀에 들려왔다. 이상하다. 이 정도면 느린 속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나의 부산한 손놀림이 의아한 듯 옆에 앉은 후배가 내 얼굴과 전화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배님, 뭐하시는 겁니까? "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컴퓨터 자판의 숫자를 누르고 또 두드렸던 것이다. 오늘 아침의 민망한 일을 채 잊기도 전에 또 후배 앞에서 망신살이 뻗쳤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우리 네 여자는 카풀을 해왔다. 처음에는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을 아낄 심산으로 돌아가면서 차를 가져오기로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덤으로 얻는 재미가 기름값을 능가해 갔다. 일행이 오십대 중반이 셋, 사십대 중반이 하나라고 하면 그 까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삼사십 분의 출퇴근 시간은 각자의 시집 흉과 남편 흉, 친정 자랑과 자식 자랑으로 늘 짧기만 하다. 어떤 날은 말하고 듣는데 열중하다가 목적지를 훨씬 지나 차를 돌려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먼저 돌아와 길을 바로잡는 역할은 그나마 젊은 사십대 후배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비상등을 깜빡이며 대로 가에 한참이나 차를 세워 놓았는데도 그 후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차 안에서는 오십대 셋이서 좀 전까지 해오던 살림살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한 사람이 혼잣말로 '무슨 일이 있는가? 너무 늦는다'하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누르다가 말고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 "선배님들, 저는 내일 일이 있어 제 차를 가져갑니다. 기다리지 말고 가세요. 아침에 말씀드리려다가 혹시나 잊을까 봐 지금 말씀드립니다."

후배는 어제 퇴근길에 먼저 내리면서 두 번 세 번 당부를 했었다.

"후배,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런 걱정을 하누?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이나 있는데."

후배의 걱정에 마음이 살짝 상한 오십대 셋은 입을 샐쭉 모으고 합창이라도 하듯이 큰소리를 쳤었다. 사실 평소에도 젊은 사십대가 없으면 이리저리 잊어먹는 일이 많아 낭패를 볼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날 저녁의 그 허세는 다 어디 가고 위험한 대로에 차를 세운 채 또 후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일 후배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오십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말하지 말자."

우리는 씁쓸한 미소를 나누며 굳은 약속을 했다.

그런데 한나절이 가기도 전에 그 후배에게 내 치부를 들켰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가슴이 뜨끔해 왔다. 나는 겸연쩍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얼른 전화기를 들고 흐릿해지는 총기(聰氣)를 붙잡으려 애를 썼다.

수필가'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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