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의 쾌활한 모습과 달리 다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였다. 내년 총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한나라당 공천을 목표로 뛰고 있는 공직자이다.
고향 민심이 꽤나 냉랭했던 모양이다. 그는 "'똑바로 하라'는 질책은 수도 없이 들었고,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서는 표 못 준다는 '협박'도 기본"이라는 하소연 뒤에 결국 "무소속 출마를 고민해봐야겠다"란 말까지 꺼냈다. 현 정부에 나름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여권의 고위급 인사로서는 정말 체면 깎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물갈이론이 거셀수록 정치 신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아니냐"고 떠봤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에는 위기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전당대회 이후 '바꿔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여론이 훨씬 강해졌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밉다는 것이다. 무소속 연대 움직임이 벌써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일리 있어 보였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텃밭'인 대구경북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4'27 재보선 참패를 통해 민심 이반을 뼈저리게 확인하고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고도 변화를 이야기한다. 일부에서는 달라지는 한나라당이 회생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비친다.
그러나 국민들 눈에는 7'4 전당대회 이후에도 새로운 비전 제시와 화합은커녕 자리다툼에만 골몰한 게 전부다. 밤낮으로 민생을 챙겨도 모자랄 판에 고성과 삿대질에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계파 이익' 챙기기에만 바쁜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도리어 이상하지 않을까.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지도부 간 갈등도 심상치 않다. 우리금융지주'대우조선해양의 매각 방식, 전'월세 상한제, 서울 무상급식 투표 지원, 한미 FTA 비준안 처리 등 사사건건 충돌이다. 없어질 것이라던 계파 대결은 전보다 노골화 정도가 덜 할 뿐 여전하다. 친박계의 숫자가 늘어났을 뿐 상대방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유승민 최고위원은 최근 사석에서 추가 당직 인선과 관련, "홍준표 대표의 술책에 당했다"라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 측근의 사무총장 발탁에 유 최고위원이 강하게 반발했던 것을 감안, 여의도연구소장과 제1사무부총장을 추천해달라고 해놓고선 일부러 약속을 어겨 친박 진영의 균열을 꾀했다는 논리였다. 뿌리 깊은 불신이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 같은 내부 불협화음을 두고 "변화의 몸부림으로 예쁘게 봐 달라"고 했다. 새 지도부가 출범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여론의 평가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질 것이라는 유행가 가사를 생각해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첫술에 배 부를 수는 없다. 당 지도부도 22일 확대당직자회의에서 변화를 향해 새출발하자는 데 뜻을 모으기는 했다. "홍 대표의 감시자가 되겠다"고 했던 나경원 최고위원은 "당이 이제 안정궤도에 들어섰다"고 숙였고, 유 최고위원은 "친이, 친박 구분 없이 제 자신부터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겠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지금 같은 한나라당이 '봉숭아학당'에서 벗어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않은 듯하다. 심지어 8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 때문에 계파간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분당(分黨) 직전 수준까지 갈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차별화를 위한 '대통령 때리기 작전'이나 '포퓰리즘 전략'도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할 전망이다. 문제는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잘못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얼마나 빨리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느냐에 따라 작은 일로 매듭될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질지가 갈린다. 그러나 지금의 한나라당은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려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집권여당이라는 '위험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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