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4)구석본 시인의 칠곡 지천

입력 2011-07-23 07:38:51

대구로 통근한 지천역, 이젠 정차하는 열차 없어 쓸쓸

매일 대구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마주했던 지천역. 기적소리와 함께 열차가 휙 내달린다. 내마음도 어느새 유년시절로 줄달음친다.
매일 대구까지 기차로 통학하며 마주했던 지천역. 기적소리와 함께 열차가 휙 내달린다. 내마음도 어느새 유년시절로 줄달음친다.
잔디골로 불리던 골짜기를 넘어 오가던 지천초등학교 교정에는 그때 그 플라타너스가 아름드리 고목이 돼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잔디골로 불리던 골짜기를 넘어 오가던 지천초등학교 교정에는 그때 그 플라타너스가 아름드리 고목이 돼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상납실 마을 뒷산으로 소먹이러 다니던 오솔길.
상납실 마을 뒷산으로 소먹이러 다니던 오솔길.
구석본 시인
구석본 시인

어제까지 지겹도록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오후 2시 조금 넘어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향하였다. 대구와는 지척이다. 매천대교를 지나 속칭 돌고개를 넘으면 내 고향 칠곡군 지천면이다. 내가 살고 있는 상인동에서 출발하면 빠르면 자동차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상상 속의 고향 산천은 언제나 한결 같다.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에서 마을 쪽으로 되짚어 들어가면 동네 앞 내(川)가 나오고 그 내를 건너면 수년 전에 세워진 마을회관이 동네 어귀를 지킨다. 둑을 따라 한 20여m쯤 가면 옛날 동사(洞舍)가 있고 그 옆 뒤쪽으로 우리 집이 비켜 서 있다.

실제의 고향은 너무 변했다. 그리고 변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대형 창고가 들어섰고 논밭은 비닐로 하얗게 뒤덮였다. 우리 집도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졌다. 동네의 대부분 집이 옛 모습이 아니다. 우리 집 담장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집주인이 누구인지 지금은 모른다. 두 번 바뀌었다는 소문만 들었다. 고향 마을은 빗속에서 정물처럼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우기 싫어 조용히 동네를 벗어나 앞내 다리 위에 섰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내(川)는 강이라 부르기에는 그 폭이 좁았지만 그렇다고 내라기에는 넓었다. 냇가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여름날이면 물놀이와 씨름, 겨울이면 얼음지치기와 들불놀이로 해지는 줄 몰랐고 밤 깊어가는 줄 몰랐다.

이번 장맛비로 제법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반갑게 인사한다. 바라보니 먼 집안 조카뻘 되는 사람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그간의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경운기를 몰고 밭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도 어느새 장년의 풍모가 보인다. 내 옆을 지나려던 차가 멈추더니 한 아주머니가 내린다. 자세히 보니 대구에서 규모가 큰 가구점을 경영하는 집안사람이다.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내가 조(祖)자 항렬이라 나를 할배라고 부른다. 반갑게 인사하며 대구로 가는 길이지만 집으로 가자며 차를 되돌리려 한다. 사양을 했더니 고추라도 좀 따 가라고 권한다. 그들이 있기에 아직 고향은 가슴에 늘 싱그럽게 살아 있다.

민둥산이었던 앞산, 그래서 대구로 오가는(옛날에는 대구까지 앞산을 넘어 걸어 다녔다) 사람들의 행렬이 동구에서도 보이던 장길이 있던 그 산이 나무로 빽빽하다. 어릴 적 소를 몰고 오르내리던 그 산길도 나무로 묻혔다. 앞산 기슭을 따라 학교 다니던 길이 숲에 묻혀 버린 것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산 중턱을 가로 지른 잔디골이라 부르던 골짜기를 넘어 학교로 갔었는데 그 길이 없어진 것이다. 그 잔디골에 들어서면 머리 푼 귀신이나 달걀귀신이 나올 것 같아 늘 가슴 조마조마했다. 나무 그늘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그곳마저도 그리움으로 젖어온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가 내 고향의 행정구역이다. 속칭 납실이라 불린다. 연호리는 가정(架亭), 상납실, 중납실, 하납실 네 자연부락이 모여 있다. 그 중 상납실이 나의 고향이다. 어릴 적 상납실은 60가구 가까이 살았다. 10여 가구의 김(金)씨, 배(裵)씨, 차(車)씨, 소(蘇)씨를 제외하면 능성(綾城)을 본관으로 하는 구(具) 씨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의 지형은 북쪽 산을 뒷산으로 하고 남쪽 산을 앞산으로 하여 마주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내(川)가 동에서 서로 흐른다. 그 내를 중심으로 넓지 않은 들판이 양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구씨 집안의 입향조(入鄕祖)는 구연우(具連佑) 선생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으로 크게 공을 세운 분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찾아든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그 후손들이 상납실, 하납실, 가정에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중납실은 동래 정(鄭)씨들 1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납실이라 불리게 된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마을 어디에선가 납(鉛)이 생산되었거나 묻혀 있을 가능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마을 뒤쪽에 법전이라는 계단식 들판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 들판 양쪽 산기슭을 따라 절이 있었다고 한다. 추수철이 되면 그 절에 곡수가 마을 앞을 지나 줄지어 들어갔다고 해서 들일 납(納)자를 써서 납실이라 불렸다고 한다. 법전을 한자로 표기하면 法田쯤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법전이라는 지명도 그러하거니와 법전 양쪽의 산골짜기들이 약사(藥師)골, 미륵(彌勒)골, 사바(娑婆)골, 보리(菩提)골로 불리는 것도 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법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의 산줄기가 신동재 쪽으로 뻗어간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꼼틀거리며 올라가는 형세다. 이 두 산줄기가 신동재에서 합쳐진다. 신동재는 전국 최대의 아까시 꿀 밀원지(蜜源地)로 유명하다. 신동재 굽이굽이를 돌면 그 잿길이 십 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 만큼 운치 또한 깊다. 5월이면 이 신동재에서 아카시아 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릴 무렵이면 내 고향 일대는 아카시아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아까시꽃은 후각으로 다가온다, 아까시꽃은 비록 탐스럽고 화사하지는 않지만 꽃잎의 흰 빛깔은 미묘하면서도 깊은 아름다움을 지닌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낙화시(落花時)에는 그 아름다움을 잃기 마련인데 아카시아꽃은 예외다. 낙화할 때 그 아름다움이 더하다. 바람에 흩뿌려지는 아까시꽃은 흰나비의 군무를 보는 듯하다. 또한 향기를 끝까지 지니고 있어 지면서도 향기롭다. 그러기에 내 고향의 추억은 언제나 향기롭다.

모교 지천초등학교에 들렀다. 내가 다닐 때 단층 목조 건물이었던 교사(校舍)가 2층 벽돌 건물로 변했다. 그렇지만 운동장은 어린 시절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느티나무도 그때의 그 자리에 서 있다. 다만 당시 500명이 넘던 재학생이 지금은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도시에 인접해 있는 농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동네 아이들 대여섯이 축구공을 차고 있다. 수십 년 전의 내 모습을 그 아이들에게서 보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차를 몰아 지천역으로 향했다. 중, 고, 대학교를 기차로 통학한 나에게는 지천역 또한 내 삶의 뿌리다.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 40분쯤 걸어야 닿을 수 있었던 지천역이었다. 그러나 고달프지만 않았다.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으며 고독과 두려움을 알았고 상상의 날개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가을이면 철길 옆으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며 아름다움은 화려한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애잔함에서도 느낄 수 있음을 알았다.

지금의 지천역에는 정차하는 기차가 없다. 당연히 승하객이 없는 역이다. 역사를 관리하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플랫폼에 서 보았다. 문득 멀리서 기차소리가 들린다. 연기를 하얗게 뿜어 올리며 달려오는 기차,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그러나 내 환상을 깨고 유선형 새마을호가 기적도 울리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고향에서 그리움이 묻은 현장이 많이도 사라졌듯이 먼 미래에는 내 그리움의 한 축인 지천역도 사라지게 되리라.

지금 같은 도시적 삶의 양식이 지속된다면 언젠가 '고향'은 사전에서만 볼 수 있는 단어가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고향을 가지지 못하는 그래서 실향의 아픔조차 알지 못할 다음 혹은 다다음 세대들에게 고향을 대체할 그 무엇인가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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