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산 독립운동에 쏟아붓고, '400년 巨富' 의연하게 포기했다
최부자 가계를 말할 때 어려운 이웃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집안의 나라사랑'교육 문화에 대한 투자도 전자에 못지않다. 독립운동에 대한 물심양면 지원은 국민들을 숙연케 한다.
최부자집 명성은 왜 끝이 나게 됐을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드는 의문이었다. 취재를 마치며 느낀 소감은 '최부자집은 막을 내렸지만 최부자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자인 문파(汶坡) 최준(1884~1970)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광복과 후학 양성, 문화창달에 쏟아부었다. 최준의 장손인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최염(79) 명예회장은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데 대해 "물려받은 것이 없어 조금 아쉬울 때도 있다. 최부자집 후손이라면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사주지 못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전 재산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쓰신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당대 최고 독립투사들과 교류
'경주 최부자 500년의 신화'를 쓴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이 책에서 최준의 집을 찾은 독립투사'명사들 가운데 최익현, 안희제, 신돌석, 손병희, 김성수, 정인보, 박상진,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등이 대표적이라고 기록했다. 최부자집을 찾은 독립투사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아가 최준이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희제, 손병희와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손병희 사후 그의 묘소에 손자 최염 회장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형제'친척이 독립운동 가문
박상진은 그의 사촌 자형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부귀 영화의 길 대신 대한광복단을 만드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대한광복단은 1918년 조직이 일제에 노출될 때까지 4년간 국내외에서 활동한 가장 큰 비밀결사단체로 알려져 있다. 자형에게도 아낌없는 자금 지원을 했다고 한다.
형제 중에는 둘째 동생 최완(1889~1927)도 형을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백산상회 설립
최염 명예회장이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내용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백산상회 운영 비화는 최준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게 해준다.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백산 안희제가 문파를 찾아왔다.(백산과 백범을 '양백'이라 할 정도로 독립운동사에서 백산의 비중은 크다.) 서로의 명성을 익히 알던 터라 쉽게 말이 통했다. 자금 지원 요청에 따라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안전하게 보내려면 무역회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18년 문파가 주도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웠다. 군자금을 지원하려면 논밭을 팔아야 하는데 일제에 탄로나기 십상. 이를 은폐하려면 돈을 해외로 자유롭게 반출할 수 있는 무역회사가 적격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군자금 지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최준은 전답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자금을 수출입용으로 위장, 백산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다. 10년 만에 부채가 당시 130만엔(쌀 3만 석에 해당되는 돈)에 달했다. 최부자집의 연수익이 1만 석이니 보증액수 3배 초과로 완전 알거지가 된 셈.
손자인 최염 명예회장은 "이때 할아버지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기로 작정했다는 말씀을 후에 내게 하셨다"고 전했다.
최준은 백산무역 설립 이후 한동안 대출과 상환을 제대로 해 은행의 환심을 산 뒤 본격적으로 거액의 대출을 받아나갔다.
◆멸문의 위기
조선 제일의 부자였기에 은행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8년 백산무역은 파산했다. 매출은 없이 차입에만 의존하니 회사 운영이 될 수 없었던 탓. 은행이 보증을 선 최준의 재산을 처분하면 13대째 내려오는 부자의 명성이 퇴색될 위기에 처했다.
대출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된 데는 일제의 작전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최준이 돈을 갚을 능력이 안 되면 상환유예 등의 조건으로 그를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킬 수 있다는 계산.
백산무역이 파산하면서 최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 일본 총독부는 상환유예를 결정했다. 오랫동안 최부자를 연구해온 경주 교동 최씨고택관리인 최용부(69'문화해설사) 씨는 "총칼통치를 강행해서는 한국 민심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문화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민중들의 존경을 받던 최부자를 파산시켜버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최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의친왕과 식산은행 총재이던 아리가(총독에게 식민지정책을 자문하는 일본 귀족가문 출신)의 대총독부 설득도 한몫을 했다고 동의대 최해진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적고 있다.
◆독립자금 지원으로 옥살이까지
독립운동 자금 송금이 탄로 나서 헌병대, 경찰서 등으로 끌려다니며 옥살이를 했고 그 후유증으로 서거할 때까지 고통을 겪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자가 재산을 늘리는 방법은 친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최준은 이를 거부하고 전 재산을 광복을 위해 바쳤다.
이런 그이지만 조국이 광복된 이후 건국훈장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에 별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나서 공적을 자랑하던 때였다. 겸손으로 13대를 살아온 최부자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최정암기자 jeong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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