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장 활래정 정자 앞에서 나 자신을 새로이 얻다
누군가의 시간 앞에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나 자신을 찾기도 어려운 일인데 타인의 시간 앞에 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님들이 안거(安居) 기간 중에 면벽 가부좌하여 나(眞我)를 찾기 위해 길 떠나는 것도 어쩌면 누군가의 시간 앞에 서 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아닐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란 소설을 쓴 작가 최인호는 "'낯익음'과 '낯섦'은 결국 이음동의(異音同意)로 그게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낯익다'는 표현은 '낯설다'는 공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낯설지 않다'고 최면을 거는 중얼거림이 끝내 '낯익은 것 같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가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내가 나로부터 낯설어지는 그 쓸쓸함과 두려움을 알기에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까닭 없이 목 놓아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무력한 슬픔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나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슬픔 때문에 좌절도 하고 통곡도 하는 것이다.
나는 강릉 땅 선교장에 있는 활래정(活來亭)이란 정자 앞에서 나 자신을 잠시 잃어버린 적이 있다. 난생 처음 가 본 그 정자는 내 이름인 활(活)자에 올 래(來)를 붙여 '활이가 오는 정자'라는 편액을 이마에 붙인 채 200년 넘는 세월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한겨울이어서 연당의 연들은 목이 꺾인 채 마른 줄기로 서 있었고 불어오는 매운 바람이 빙판 위를 쓸고 지나가는 매우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함께 온 문화유산 답사객들은 우르르 선교장 안으로 몰려갔지만 나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활래정'이란 편액을 보는 순간 '세상에 이럴 수가 '하는 감탄도 잠시, 몸에 힘이 쭈욱 빠져나가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서 폭발하듯 터지거나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켜진 섬광이 눈알 밖으로 튀어나가는 기적 같은 일을 당할 때가 더러 있다.
스님들에게는 그때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이르는 해탈의 시간이리라. '활래정'이란 낯설지만 어느 먼 우주 끝에서 영혼의 교감으로 이미 만나 본 듯한 그 정자와 맞대면하는 순간의 느낌이 바로 그랬다. 바로 이런 때를 만나면 자신의 인생에 큰 획이 그어지거나 사람들이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시공(時空)으로부터 크나큰 에너지를 얻어 정신이 성숙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정자 앞에서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잠시 나를 잃어버리고 나니 오히려 더 크게 얻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교장과 활래정을 지은 이 집주인의 정신이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인 이내번(1708~1781)이 터를 잡은 이래 300년을 내려온 이탈리아 메디치가에 비견되는 명가다. 이 집 어른들은 120칸 대저택을 일 년 사철 열어 두고 문인 묵객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해 왔다.
통천군수를 지낸 이봉구(1802~1868)는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어 굶고 있는 이웃들을 먹여 살렸다. 또 후손 이근우(1877~1938)는 거문고를 좋아하여 전국의 명인들을 불러들여 후한 사례비를 주어가며 몇 달씩 묵어가게 하고 풍류의 극치랄 수 있는 '열린 음악회'를 수시로 열었다. 그는 사랑채인 열화당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후손을 위한 족보와 선조들의 음덕을 기리는 문집을 인쇄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선교장과 그 집을 감싸고 있는 뒷동산의 솔숲을 한 바퀴 돌았다. 아주 낯선 시간 앞에 서서 해탈에 버금가는 불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보니 그것은 오히려 '낯섦'이 '낯익음'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활래정 인근 초당두부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생각의 불씨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답사 노트를 꺼내 '풍류'(風流)라고 크게 적었다. 선비 이근우의 풍류를 배워 따르고자 함이다. 이날 나는 누군가의 시간 앞에 서서 '풍류'라는 귀한 화두 한 자락을 얻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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