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가 눅진눅진하게 녹아내리는 폭염이다. '여름' 하면 통상 공포영화를 떠올린다. 선혈이 낭자하고, 사지가 뜯겨져나가는 슬래셔 무비들이 각광을 받을 때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잠시 더위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짜증 섞인 불쾌함이 몰려들기도 한다.
지난 주말 TV에서 방영한 '12명의 노한 사람들'(1957년'사진)을 시청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18세 소년의 유죄와 무죄를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벌이는 불꽃 튀는 대립을 그린 작품이다. 예전에 본 영화지만, 다시 봐도 걸작 중에 걸작이란 생각이 든다.
12명의 남자들이 선풍기조차 고장 난 작은 방에서 땀을 철철 흘리는 영화지만, 몰입감과 함께 영화가 끝난 이후 밀려드는 청량감은 가히 일품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피고석에 앉은 한 소년이 클로즈업된다. 재판정은 소년의 유죄를 단정하는 듯한 느낌이다. 뒷골목에 살고 있는 스페인계 불량소년이 아버지를 예리한 잭나이프로 살해했다. 목격자도 있고, 살해동기도 있다. 너무나 뚜렷한 유죄의 정황. 12명의 배심원들이 좁은 방에서 최종 결정을 위해 1차 투표를 한다. 유죄 11명, 무죄 1명. 만장일치의 유죄결정에 맞서 완벽한 확신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는 단 한 명의 배심원(헨리 폰다). 그는 다른 배심원들의 반박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무죄의 가능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11:1에서 10:2, 8:4, 6:6…. 처음 유죄를 믿었던 사람들이 차츰 그의 뜻에 동조하게 되면서'12명의 노한 사람들'은 배심제, 무죄추정 등 미국 사법제도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진정 용기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등을 포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구조나 배경은 간단명료하다. 배경도 방 한 칸이고, 설정 또한 살인사건에 국한된다. 하나의 단순한 사건을 가지고 거대한 담론을 끌어내는 서사적 힘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런 응축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서 폭발하면서 큰 울림을 던져준다.
'더위' 하면 또 떠오르는 영화가 '보디 히트'(1981년)이다. 파격적인 섹스신과 뜨거운 욕망이 미국 플로리다의 한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다. 3류 변호사 러신(윌리엄 허트)에게 관능적인 여인 매티(캐서린 터너)가 접근한다. 그녀는 돈 많은 남편이 있지만 삶이 답답하다. 그녀의 유혹에 러신은 그녀의 남편을 죽이지만, 결국 철창행을 면치 못한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눅눅한 무더위 속에 이야기가 진행된다. 땀에 흠뻑 젖은 욕망이 프라이팬에서 달궈진 튀김기름처럼 뜨겁다. 악녀에게 포획된 한 남자의 답답함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더위로 더위를 다스리는 이열치열의 영화. 무더위의 정점에서 보면 좋을 영화다.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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