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 벗으면 네팔 노동자로 여겨…한국 의사면허증 보여드릴까요"
"저는 아침에는 한국 사람이었다가 저녁이면 네팔 사람으로 변해요."
서글서글한 눈매에 연방 미소가 끊이지 않는 라제스 천드러 조시(40) 씨는 지난해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현재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가정의학과 레지던트(전공의) 1년차로 생활하고 있다. 발음이 아주 약간 어눌한(?) 점을 빼면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는 3시간의 인터뷰 시간 동안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며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벌써 한국생활이 19년째니 이제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유머 감각까지 뛰어난 그. "아침에 출근할 때 깨끗하게 면도하고 깔끔한 얼굴로 정장을 갖춰 입고 출근하면 제가 외국인이라고 의식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저녁이 되면 피곤에 절어 가뜩이나 한국인보다 조금 검은 낯빛이 더욱 검게 변하잖아요. 게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자라나면 꼭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네팔사람처럼 보이는구나' 싶은 거죠"라며 웃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최고의 성적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낮없이 공부하는 세월을 꼬박 10년 가까이 견뎌내야 한다.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의사'라는 직업에 도전해 성공한 이방인. 그의 낯선 외모에 환자들이 "진짜 의사 맞아요?"라고 물어오기도 하지만 이미 뼛속까지 한국사람으로 동화된 그는 천연덕스레 "저 면허증 갖고 있는 의사 맞아요. 보여드릴까요?"라면서 웃음으로 환자를 진료한다.
◆왜 한국행을 택했나?
그는 네팔에서는 꽤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사업을 하는 분이셨다. 어릴 적에는 수도인 카트만두를 벗어날 일이 없으니 네팔이 그렇게 가난한 나라인지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중학생 무렵 네팔의 시골 이곳저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기면서 '가난'이 뭔지 알게 됐고, 인생 '목표'를 세우게 됐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없어도 치료는커녕 제대로 먹을 끼니조차 구하지 못해 구걸을 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죠. 그러면서 의사가 되면 병들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으니, 어린 마음에 이보다 더 숭고한 직업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는 네팔국립대 생물학과를 마치고 1992년 한국에 왔다.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영남대 정성덕 교수가 큰 도움이 되어줬다. "가까운 파키스탄이나 인도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네팔에 봉사하러 온 한국 사람들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1992년 서울대 어학당에서 9개월간 어학코스를 밟은 그는 1993년 영남대 의대에 입학했다. 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낯선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가기도 힘겨웠고, 한국의 비싼 학비를 대는 일이 쉽지 않아 휴학을 하기도 했다.
의대를 졸업한 그는 2003년, 계명대 의대 석'박사 코스를 택했다. 네팔에서 많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피부과 이규석 교수와 맺게 된 인연 덕분이다. "피부과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교수님 권유에 계속 공부를 하게 됐죠. 네팔은 햇빛이 워낙 강한데다, 위생 관리가 되지 않다 보니 감염 문제가 심각합니다. 나중에 네팔에 돌아가 아이들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3전 4기 국시 도전기
그랬던 그가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2006년 어느 날 갑자기 국시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바로 지금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한 장모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라제스 씨보다 10살이 어린 딸을 내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그의 장모는 "딸이 네팔에서는 적응하고 살기가 힘들 것 같으니, 한국에서의 기반을 마련할 방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무렵 네팔에서도 의사가 되기 위한 제도가 바뀌면서 의대만 졸업한 그가 네팔에서 의사가 되려면 다시 시험을 봐야 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거 한번 한국에서 도전해보자 싶었습니다. 피부과 석'박사 과정 공부하면서 다른 동료들은 '의사'인데 저만 '학생' 신분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국시를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언어가 문제였다. 일상 언어는 유창한 그였지만, 의료 전문 과목에 나오는 어려운 용어들을 이해하는 일이 문제였다. 더구나 그가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사이, '한자어'로 표기됐던 용어들이 다 우리말로 풀이돼 사용되면서 그의 입장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공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아내와 장모님의 기도가 없었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2006년부터 4번 시험에 응시한 끝에 2009년 합격할 수 있었다.
◆10살 어린 아내
그는 처가와 인연이 각별하다. 처음 장인'장모를 알게 된 것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남대 앞에서 건재상을 하고 있던 그의 장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둥지'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들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네팔인 1명이 사고를 당해 죽으면서 뒷수습을 도와줄 통역을 찾기 위해 라제스 씨에게 연락이 닿게 되면서부터다.
"거의 한 달 넘게 장례식장과 대사관, 현장 관련 업체 등을 뛰어다니며 보상금 문제 처리를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없는 거예요. 장모님은 죽은 네팔인의 지인 수십 명의 밥을 챙기고, 장인어른 역시 가게 문 걸어 잠그고 사망보상금 문제를 위해 뛰어다니시더라고요. 존경스러운 마음이 절로 생기데요. 그 후로 가게를 오가면서 형님, 누님으로 모시면서 한가족처럼 지냈어요."
그런데 '정'이 무서웠다. 처음 만났을 당시 초등학교 6학년 꼬맹이에 불과했던 지금의 아내에게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좋아하기 시작했던 게 아마 와이프가 중학교 3학년쯤 됐을 때였을 거예요. 좋긴 한데 너무 어리니 말도 못 하고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공부도 가르쳐주고, 나쁜 길로 빠지지 못하게 잔소리도 많이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와이프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고백을 했죠."
한가족처럼 지내던 사이였지만 막상 결혼은 쉽지 않았다. 장모는 "자네가 한국인이었으면 두말 않고 딸을 줬겠지만, 아직 어린 내 딸이 정세도 안정되지 않고 생활환경도 쾌적하지 못한 네팔에 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2005년 네팔로 봉사활동을 가며 아내를 데리고 가 그곳에서 기습 약혼식을 했다. "아내에게도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냥 다짜고짜 온 가족'친지들 앞에서 반지를 끼워준 뒤에야 그것이 약혼식 행사였다는 것을 말한 거죠. 놀란 아내는 울먹이고 한국에 계신 장인'장모님은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 하셨지만,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아내를 놓칠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건 이후 아내의 행동이었어요. 교회에서 아내가 좋다며 따라다닌 남성들이 꽤 많았는데 한결같이 '나는 약혼한 사람'이라며 거절하는 겁니다. 네팔에서 행해진 약혼식이다 보니 아내 입장에서는 무시하고 돌아선다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하고 문제가 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제 가족들 앞에서 한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해 준 거죠."
◆지금은 가정의학과 전공의
그는 현재 동산병원 가정의학과 1년차 레지던트다. 국시에 합격한 뒤 전공을 바꾼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국에 와 있는 다문화가정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낯선 이방인이 한국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오직 네팔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한국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가 한국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8개월 된 예쁜 딸 세라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네팔에 가서는 이들이 적응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한국에서 그의 입지를 다지겠다고 맘먹게 된 것.
"한국에 사는 동안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의 여성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제가 정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인도어와 파키스탄어, 영어를 두루 구사할 수 있어 외국인 진료에는 장점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렇게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나니 다양한 병의 1차 진료를 할 수 있는 가정의학과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현재 동산병원 김대현 교수님께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셔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까닭도 컸습니다. 그렇다고 네팔에 돌아가 병원을 짓겠다는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과 네팔을 오가면서 두 나라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해내고 싶습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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