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배 드나들던 나루터, 살림밑천 밤나무숲 이젠 추억으로 남아
낙동강이 마을 서쪽을 흐르고, 낙산리와 금산리 사이를 관통하는 낙산천이 마을 앞에서 낙동강 품에 안긴다. 금무산 줄기가 동남북으로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칠곡군 왜관읍 낙산1리 가실마을은 금무산 줄기인 무지미산(무덤산)과 자라산(남산)이 에두르고, 낙동강과 낙산천이 흘러 강과 산이 잘 어우러진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때문에 무지미산 능선 일대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는 흔적이 나타난다. 한강 정구가 450여년 전 거처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고, 경상도 일대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가실성당이 116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둥지를 틀고 있다.
◆이참봉과 일제가 바꾼 낙산천 물길
조선시대 광주 이씨 집성촌이었던 가실에 이동호란 세도가가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말단 관직인 참봉이었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했던 이참봉은 씀씀이는 구두쇠였다고 한다. 큰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지역에서 힘과 돈이 많다 보니 세도가 좋았다는 것. 세력 있는 집이다 보니 구걸이나 신세를 지기 위해 찾는 이들이 붐볐다. 특히 바랑을 짊어지고 염불을 하면서 목탁을 두드리며 찾는 떠돌이 스님이 자주 들렀다. 이참봉은 스님이 자주 찾아와 귀찮게 한다고 여기고 제대로 골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참봉은 어느 날 한 스님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머슴을 시켜 스님의 귀를 끈으로 묶어 창고 안에 매달도록 했다. 곤욕을 치른 스님은 다음날 풀려났고, 이 소문은 다른 고을로도 퍼졌다.
이름난 사찰의 큰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참봉을 혼내주기로 작정했다. 이 대사가 이참봉 집을 찾자, 이참봉은 역시 대사의 귀를 매달려고 했다. 대사는 애걸복걸하며 "샌님 제 말 한마디만 들으면 더 크게 부자가 된다"고 설득하자, 이참봉이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했다. 대사는 동네 산과 집안에 말뚝을 박고, 마을 앞을 흐르는 도랑(낙산천)의 물길을 돌리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참봉은 대사의 이야기를 들은 뒤 자라산과 집안 부엌에 쇠말뚝을 박고, 낙산천 물길을 돌렸다. 낙산천은 당초 북쪽에서 흘러내려 자라산을 에둘러 남쪽으로 흐르다 낙동강에 합류했다.
이참봉은 머슴과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마을 앞으로 흐르던 물길을 자라산을 두르지 않고 곧바로 서쪽 낙동강 방향으로 흐르도록 'S' 형태로 바꿔버렸다. 이후 이참봉 집안의 말이 병들어 죽고, 집안 자식이 죽고, 부엌의 금두꺼비도 죽었다고 한다.
이종환(76)씨는 "이참봉 전설이 마을에 전해오는데, 물길을 돌리고 난 뒤 자손을 잇지 못한 채 결국 집안이 망했다고 전한다"며 "자라산 주변으로 (낙산천) 물이 흘러 자라가 그 물을 마시고 살았는데, 물길을 돌리면서 물이 마르자 자라가 죽었다는기라. 혈이 죽었단 이야기라. 그래가지고 이참봉이 거지가 됐어"라고 말했다.
이차연(76)씨는 "옛날 (낙산천) 도랑이 (자라)산으로 해서 금남1동으로 해 2동으로 저리(남쪽으로) 흘렀어. (이참봉이) 산하고 물길을 모두 끊었어. 그러니 망했어. 그래가지고 저(이참봉) 사람들은 우리 일가 중에 좀 못됐어"라고 했다.
이참봉과 집안 묘는 지금도 가실마을 회관 옆 산에 남아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낙산천 물길은 일제강점기 또한번 바뀌었다. 낙산천이 가실마을 앞에서 S자형으로 굽어 흐르다보니 배수가 원활하지 않으면서 늪이 생겼던 것이다. 늪에는 갈대밭이 무성했다. 일제는 마을의 곡식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S자형 물길을 직선으로 흐르게 하는 직강공사를 벌였다. 결국 낙산천 물길은 이참봉과 일제에 의해 두 차례 바뀌어 지금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배터와 가실나루터, 그리고 밤나무숲
가실마을 서쪽 낙동강변은 나루터와 밤나무숲의 흔적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부터 배를 댔던 터라고 '배터', 부산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가실나루터', 가실사람들의 살림밑천이 됐던 밤나무숲이 모두 이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배터는 현 낙산초등학교 앞 낙동강변이다. 예전 이 강변에는 물이 깊은 소가 있었는데, 이 소에 큰 바위가 있어 배를 매다 걸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배터로 불렸다. 배터는 뱃덤으로 불리다 결국 이 주변이 가실의 작은 마을, 배태로 불렸다.
배터가 조선시대 배를 대던 터였다면, 이후 부산 소금배가 올라왔던 곳은 배터 바로 남쪽 가실나루터이다. 가실나루는 일제강점기까지 부산 소금배가 올라왔고, 강 건너 성주 선남면 용신리를 오가던 마을 배도 운용됐다고 한다. 부산 소금배는 가실나루에서 짐을 부리고 주변의 쌀이나 콩, 팥, 깨 등과 물물교환을 한 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종환씨는 부산 소금배에 대해 설명했다.
"큰 돛단배가 부산에서 올라오면 나루터에 대는데, 물이 얕으면 장골 열 댓 명이 붙어 밧줄을 어깨에 미고 끌어 땡기는 기라. 소금을 가득 싣고 오면 곡식으로 바꿔 한 가득 싣고 하루나 이틀 묵어요. 뱃놈이라고 술집에 와서 엽전을 많이 썼어. 술장사 하면 술집 부엌에 단지를 하나 묻어놓고 술값으로 엽전을 받아 단지에 쌓았지. 금방 가득 찼다고 해."
가실에서 다 팔지 못한 소금은 상류쪽 왜관읍 소금창고에 보관했다고 한다.
가실나루와 배터 주변에는 1960년대 초부터 밤나무숲이 조성됐다. 1962년 일본에서 수입한 밤나무 모종을 들여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배터 주변 수천평에 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재래종 밤은 토종밤 보다 훨씬 굵고, 출하시기도 8월 추석 이전이어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가을이 되면 밤숲에서 밤을 따다 장에 팔아 살림에도 보태고, 아이들 학자금도 냈다.
박용삼(73)씨는 "62년도에 밤나무 모종 가져왔어. 우리 밭은 한 2천평 있었는데, 대구 서문시장에 가 밤 내놓으이 '밤이 이런게 어딨노. 와 이래 커노. 추석 아래 우째 나오노'라고 모두 놀랐지"라고 말했다.
정순용(80.여)씨도 "8월달에는 밤 팔아가지고 아들 공납금도 주고, 추석도 쉬고, 돈이 좀 됐지"라고 했다.
배터 앞 밤나무숲은 1980년대 이후 비닐하우스 참외농사 등을 지어면서 대다수 사라졌다.
◆무, 배추에서 참외, 벼농사로
'매기가 하품만 하면 물이 든다.'
가실은 매기가 하품만 하면 물이 넘칠 정도로 잦은 수해를 입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수리시설이 갖춰져 물을 끌어댈 수가 있었지만, 2000년 들어서야 낙동강 제방이 만들어진 바람에 이전에는 범람을 우려해 벼농사는 제대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는 예부터 기껏해야 무, 배추, 토란 농사가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마을에 참외모종을 키우면서 참외가 관심을 모으면서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가실의 주재배작물이 됐다. 당시 5, 6가구에 불과했던 참외 재배는 현재 마을 대다수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업이 됐다. 참외 모종을 처음 들여왔던 당시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모종이 빨리 자라도록 엎어두는 천을 제때 거두어들이지 않아 잎이 누렇게 떠버린 바람에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또 대나무로 만든 참외 대가 바람에 휭하니 날아가 버려 수차례 작업을 반복하는 등 숱한 실패 끝에 참외농사가 정착됐다. 지금은 높은 당도와 단단한 육질을 자랑하는 가실 참외는 대다수 서울에서 수매해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실에 수리시설을 갖추고 제방까지 쌓으면서 이젠 벼농사를 짓는 집도 늘었다. 이젠 매기가 하품이 아니라 요동을 쳐도 물길이 넘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 셈이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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