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기행] <29>구미 금오산 성안마을 가는 길

입력 2011-07-13 07:41:18

자연암벽 축성된 금오산성, 만명의 군사 수용한 요새

금오산 성안마을로 이어지는 옛길은 지금은 등산객들의 등산로로 사랑을 받고 있다.
금오산 성안마을로 이어지는 옛길은 지금은 등산객들의 등산로로 사랑을 받고 있다.
28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금오산을 진동시킨다고 해서 명금폭포라고도 불리는 대혜폭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금오산성.
28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금오산을 진동시킨다고 해서 명금폭포라고도 불리는 대혜폭포.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금오산성.

초승달이 봉우리에 걸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현월봉(顯月峰)을 품고 있는 영남 8경 가운데 한 곳인 금오산. 금오산은 1970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금오산 정상과 바로 아래 성안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는 길이 됐다. 성안마을은 1970년대 독가촌 철거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1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성안마을에서는 김천시 남면과 칠곡군 북삼읍으로 이어진다.

특히 금오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낙동강 길목을 조망해 적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병참기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금오산 성안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옛길에 담겨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본다.

▷고려 충절 야은 길재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한데 人傑(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가 망한 후 옛 왕조를 회상하며 지은 야은 길재의 회고가(懷古歌)이다.

금오산을 오르면서 야은 길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오산 입구 맑은 계곡 건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채미정(採薇亭)은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고려의 멸망이 목전에 닥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킨 길재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이곳에서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동문수학했던 태종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관직을 내리면서 간곡히 요청했지만, 끝내 출사를 하지 않고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가르쳐 훗날 영남학파의 맥을 이어갔다.

▷사랑과 전쟁을 품은 금오산

새로운 사랑을 이루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금오산 성안마을로 가는 옛길은 사랑과 전쟁을 한몸에 품고 있는 길이다.

금오산 입구 대혜교 다리 아래에는 물이 고여 머물다 흐르는 작은 웅덩이가 있다. 그 물속에는 작은 바위가 하나 솟아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리 난간에서 동전을 던져 물속 바위 위에 얹혀지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물의 부력 때문에 동전이 넓은 바위 위에 한 번에 올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랑바위를 뒤로하고 20분가량 올라가면 등산로 옆 큰 바위가 버티고 있다.

이 바위에는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보는 이를 위압할 만한 큰 글자는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절경'이란 뜻으로 조선조 선조 때 선산 출신으로 초서(草書)의 대가였던 황기로(黃耆老)가 썼다. 황기로는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 하여 해동초성(海東草聖)으로 불리었다.

황기로는 금오산 정상 바위 위에 '후망대'(높은 데 올라서서 저 멀리 조망하는 곳)란 글씨도 함께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미군이 통신기지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후망대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올라 왜구들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등산로를 따라 700m 정도 올라가면 금오산성의 대혜문이 기다리고 있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축성됐으며, 길이는 2㎞에 달한다.

금오산성은 현재 성벽이 대부분 무너져 원형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다. 동쪽의 급경사면이나 절벽 위에 있던 성벽과 북쪽에서 내성과 외성의 경계를 이루던 성벽은 붕괴되거나 제거됐다. 다만 남쪽과 서쪽 성벽 일부 30∼50m가량만 남아 산성의 기능은 상실됐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 때 인동의 천생산과 더불어 군사적 요충지였다. 금오산성을 중심으로 천생산성과 낙동강을 동서로 나눠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고 군사들이 쉬면서 무기를 손질하는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금오산성에는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및 군기고가 있었다. 이 대혜창에는 쌀이 2천561섬, 조 1천608섬 등이 보관되고 있었다.

조선 중종조의 기록에 의하면 '금오산은 낙동강 가에 우뚝 서서 백리 땅에 굽이쳐 하늘에 닿아있고, 밖으로는 기암괴석이 즐비해 한 사람이 성문을 지킬 수 있으며 지세가 성안은 평탄해 만 명의 군사라도 수용할 수 있어 우리나라 천험의 요새 가운데 어느 곳이 이곳보다 뛰어났던가. 저 약사봉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오가는 행인들이 환하게 보여 적들의 말 먼지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손자(孫子)의 대비가 분명할 수 있어서 성지(城地)를 설치하려 할 때 과연 누가 이곳을 버릴 수 있겠는가'라며 천혜의 군사적 요충지라고 표현했다.

▷금오산을 울리는 대혜폭포와 도선굴

28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대혜폭포의 물줄기는 금오산을 진동시킨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해서 명금폭포라는 별명도 있다.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씻어 내리는 기분이다. 대혜폭포는 주변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며 물보라에 7색 무지개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신선계라는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물이 떨어지는 일대 움푹 파인 연못을 욕담(浴潭)이라 하니 선녀들이 폭포의 물보라가 이는 날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주변 경관과 옥같이 맑은 물에 탐하여 목욕을 즐겼다 한다.

대혜폭포는 겨울에도 장관이다. 흐르던 물이 절벽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돼 초봄까지 옥색 수정 발을 친 듯 신비롭고 웅장한 천상 궁궐을 연상케 해 신비의 극치를 이룬다.

대혜폭포 아래는 자연보호운동발상지로도 유명하다.

1977년 9월 5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오셨다가 깨어진 병 조각과 휴지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자! 우리 청소작업부터 하지"라고 말하면서 손수 바위틈에 박혀있던 유리병 조각을 일일이 주우면서 자연보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대혜폭포의 절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200m가량 올라가면 신라 말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 창시자인 도선도사가 참선해 도를 깨우친 도선 굴이 있다.

도선 굴은 벼랑을 끼고 쇠사슬 난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야 한다. 간신히 한발 한발 올라가면 발 아래 해운사가 가물거리고 멀리는 구미공단과 낙동강, 해평면 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자술로 유명했던 성안마을

대혜폭포를 지나 성안마을까지는 2㎞가량 된다. 가장 힘든 구간이 할딱고개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린다해서 할딱고개로 불린다. 여기서 팍팍한 다리를 쉬어가라고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바위에 올라가면 구미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고단한 삶의 무게를 잠시 풀어놓고 산 아래 펼쳐지는 풍광을 구경하면 구름 위에 올라 있는 듯하다.

감자술로 유명세를 탔던 성안마을은 1970년대 독가촌 철거령이 내려지기까지 10여 가구가 살았다.

금오산 정상에서 서남향으로 100m 내려오면 분지가 나오는데 여기가 성안마을이다.

지금은 마을의 흔적이 없으며 장승만 덩그러니 지키고 있다. 당시 주민들이 살았다는 흔적만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성안마을에서 서쪽은 김천시 남면으로, 남쪽으로는 칠곡군 북삼읍으로 이어진다.

성안마을에는 9정(井) 7택(澤)이라 하여 금오정을 비롯해 우물과 못이 많아서 가뭄이 들 때에도 산 아래 마을보다 오히려 물 걱정이 적었다고 한다. 성안마을에는 산 정상에 어떻게 저렇게 큰 저수지가 있을까 할 정도의 저수지가 있다. 이 물은 산 아래 대혜폭포의 줄기를 만들어 낸다.

성안마을은 1780년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이 당시 108가구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광복 후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금오산 정상 미군통신기지에 미군과 국군이 주둔하면서 성안마을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주민들은 양잠을 봄, 가을에 할 정도로 성안마을에는 뽕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아직도 뽕나무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러나 성안마을은 안개가 많고 습한 기후조건이어서 누에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1960년대 성안마을에 거주했던 김종분 씨는 "성안마을은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그래서 이모작은 힘들고 재배기간이 짧은 감자, 고랭지 배추들이 대표작물이었다"면서 "감자는 씨알이 굵고 씨감자로 성밖 농가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감자술을 빚어 팔기도 했었다"고 회상했다.

성안마을로 가는 길은 과거에는 산성에 거주하던 군대와 불교 행사에 따른 사찰 방문 등이었으며, 근대로 와서는 구미를 비롯한 김천, 칠곡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산나물을 채취하거나 땔감을 마련하고 농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이용했다.

구미'전병용기자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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