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 가장 최근의 옛날이야기

입력 2011-07-12 11:08:00

꽤나 오래전, 내가 즐겨 보던 외화 가운데 '레밍턴 스틸'(Remington Steele)이란 탐정물이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에도 팬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멋진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중에 007 제임스 본드 역을 맡게 된 피어스 브로스넌의 젊은 시절 모습도 참 잘생겼지만, 상대역을 맡은 스테파니 짐발리스트의 미모도 그에 못지않게 빛났다. 언젠가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그녀가 나오는 반가운 영화를 발견했다. 영화 제목은 'The Story Lady'인데, 영어로 된 본래 제목보다 우리말로 바꿔 붙인 이름이 더 그럴듯했다. '가장 최근의 옛날이야기', 뭔가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하는 제목이다.

가장 최근의 옛날이란 언제일까. 그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어느 시점에 걸쳐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목이 가리키는 시제는 '지금 바로 이때'와 '옛날 옛적' 어느 한 쪽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져 표류하는 논리적 모순에 노출된다. 실제로 이런 시간이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2011년 현재 시점에서 완전한 과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어정쩡한 그 시간은 1980, 90년대이다. 바로 레밍턴 스틸이 방영되던 그 무렵이다.

확실히 그것은 머지않은 과거다. 지나고 나서 보니 바로 엊그제 같은 그 시절을 우리는 정신없이 지내 왔다. 아직 역사에 편입되기엔 조금 이른 탓에, 그 시대는 외딴 섬 같은 인식의 지형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은 체계적인 평가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한물 지나간 유행처럼 버려져 있다. 그 시간대가 남긴 문화적 자산은 박물관에 전시되기엔 격이 낮다고 판단되는지, 재활용품 중고가게에 놓여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철 지난 잡동사니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타임캡슐에 넣어두면 그것은 분명히 가치를 빛낼 것들임에도.

영화학 강의 시간에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던지는 토론거리가 있다. 외국 영화들을 보면 옛날 작품을 봐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데, 왜 한국 영화는 조금만 오래된 영화를 보면 세련되지 못한 티가 철철 넘쳐나는가에 관한 궁금함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대략 1980년대 중후반, 그러니까 한국 현대사에서 6월 혁명과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사람들의 예술적 감성에 커다란 질적 변화가 나타난다. 그 역사적 사건들 이전의 한국 대중문화가 덜 세련되어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문화사대주의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국 사회의 발전이 서구의 발전 속도보다 훨씬 급하게 압축되어 변해왔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좀 더 타당한 것 같다. 이와 같은 공부 또한 현재를 기준으로 과도기적 위치에 있던 가까운 과거의 문화적 산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기술공학적 진보나 대중 취향의 변화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회화나 무용, 클래식 음악 같은 예술 장르들은 한 세대 전 작품을 지금 감상해도 낡았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않는다. con(같을 동'同)-temporary(시대의), 컨템퍼러리 아트라는 개념도 미술이나 무용, 순수음악에서 통하지, 영화나 대중음악에서는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계에서는 동시대 예술조차도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등의 헤겔(Hegel)의 낡은 총체성 개념을 지금도 받들어 모시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지금 동시대를 살고 있는가. 한국사회는 특히 세대의 차이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란 전제가 짙다. 여기 '3040 광장'이 만약 삼사십 대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이끌어간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면, 나는 필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나로서는 우리 지역 우리 세대의 생각을 담아내는 입장도 아니고, 이끌어 갈 힘도 없기 때문이다. 삼사십 대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래'윗세대 사이에 끼어 대접 못 받는 어정쩡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소년이라고, 노년층이라고 그런 피해의식에서 자유로울까.

나는 앞으로 몇 차례 내게 주어진 이 지면을 통하여 대단한 예술 이론을 소개하지도, 사회 통찰력을 제시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저 가장 최근의 옛날이야기를 여기에 다시 한 번 끄집어내는 사소한 글만 쓸 것 같다. 낡은 것을 약간 덜 낡은 어법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싶은 욕심은 든다. 터무니없는 바람이란 건 나도 안다.

윤규홍(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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