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수원 광교산

입력 2011-07-07 14:00:41

수원의 주산 넘어 수도권의 명산으로

풍수에서 주산(主山)은 도읍을 아우르는 지기(地氣)의 개념. 비슷한 뜻의 진산(鎭山)은 고을을 규정하는 외형적, 지형적 의미에 초점이 모아진다. 주산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지세, 역사, 상징성 등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수원 광교산은 규모나 경치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너른 품새를 열어 사계절 관광객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주말에는 하루 5만여 명이 산을 찾는다. 연중 최다 등산객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는 북한산보다 3배 이상 많다고 한다. 산이 수원, 용인, 의왕시의 경계에 걸쳐 있어 수도권 시민들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등산코스가 잘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원의 주산을 넘어 수도권 시민들의 주산으로 떠오르고 있는 광교산으로 떠나보자.

◆수도권 도시들 포용, 한강 수계의 중심

한남정맥은 안성 칠장산(七長山)에서 산을 일으켜 김포 문수산까지 176㎞의 산길을 뻗친다. 그중 광교산은 북으로 함박'석상산, 남으로는 철마'계양산을 아우르며 400리 길 산맥의 주봉 역할을 하고 있다. 해발 582m로 낮은 편이지만 경기 중부권 도시들을 포용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로 흐르는 물줄기의 근간을 이룬다.

광교산의 본래 이름은 광악산(光岳山). 고려 태조 때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유래가 재미있다. 후삼국 쟁패기에 왕건은 마지막 장애였던 견훤을 제거하고 송도로 귀향하는 길에 광악산의 행궁(임시궁궐)에 잠시 들렀다. 산전(山展)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던 중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이름을 '광교'(光敎)로 바꿔 부르게 했다. 고려시대에는 90여 개의 사찰이 있었을 정도로 종산(宗山)으로서 명산 대접을 받았다.

광교산과 관련된 역사적 특징 하나는 세 왕조의 행궁이 자리했다는 점이다. 우연치고는 흔치 않은 일이다. 백제의 온조왕은 지금의 광주(廣州)인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사위 우성위(禹成尉)와 딸을 이곳에 보내 살게 했다. 온조는 여기에 행전(行展)을 짓고 가끔씩 사위와 딸을 보기 위해 들렀다.

고려시대에 왕건은 전술(前述)한 대로 이곳에 별궁을 세웠다. 정복군주였던 그에게 행궁은 임시사령부 기능도 함께 했다.

조선시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융릉을 세웠던 정조는 별도로 수원에 화성행궁을 지었다. 이 행궁도 광교산 가까이에 있으니 세 왕실의 임시궁궐이 모두 이 산자락에 세워졌던 것이다.

◆경기대-시루봉-상광교 버스종점 코스 인기

광교산은 성남시, 용인시, 수원시, 의왕시 등 4개의 자치단체의 접경을 이루고 있다. 한 개의 산이 4개의 중급 시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드문 일이다. 덕분에 등산로는 사통팔달로 잘 뚫려 있다. 또 주변에 백운산, 바라산이 연결돼 성남 쪽으로 종주코스로 이용되기도 한다.

일부 마니아들은 서울 강북의 불-수-사-도-북(불암-수락 사패-도봉-북한산) 코스에 대항하여 종주 루트로 삼-관-우-청-광(삼성-관악-우면-청계-광교산) 코스를 개발해 무박 2일 코스로 지평을 넓혀 가기도 한다.

코스는 거리, 하산로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나올 수 있다. 수원 쪽에서 오를 땐 경기대 입구-형제봉-시루봉으로 올라 노루목-상광교 종점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널리 알려져 있다.

취재팀은 광교저수지 옆 반딧불이 화장실 옆으로 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광교산의 또 하나 명소가 화장실. 건물의 외벽에 반딧불이 모형을 설치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좌변기에 앉으면 광교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용객들이 풍경을 감상하느라 잠시 본업(?)을 깜빡하기도 한다고.

20여분을 헐떡이며 오르면 이내 능선 길과 만난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룬 쾌적한 산길을 30분쯤 오르면 형제봉이 나타난다. 동서에 형봉, 아우봉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형제봉이다. 광교산 봉우리 중 최고의 전망처로 꼽힌다.

◆병자호란 때 김준용 장군 청태종 사위 목 베

산길은 다시 이어진다. 양치재를 지나 급경사를 오르면 비로봉 바로 못미처 김준용(金俊龍) 장군 승전비로 가는 샛길이 보인다. 김준용 장군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호남절도사로 진영의 친병과 인근 군현의 병사를 모집 군사를 일으켰다. 광교산 전투에서 그는 청태종의 사위인 백양고라(白羊高羅)와 장수 3명을 포함해 수많은 적병을 살해했다. 당시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고사(枯死)작전에 막혀 투항시기만 저울질하던 때였다. 남한산성의 코앞에서 울려퍼진 승전보는 조선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대전과였다. 지금도 광교산에는 오랑캐가 항복한 골짜기라는 '호항골'(胡降谷)지명이 전해져 온다.

6'25전쟁 때 광교산은 칠보-광교-관악산을 잇던 수도권의 주요 전선(戰線)이었다.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1개 대대가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에 따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전승비에서 나와 다시 오르막길로 오르면 정자가 있는 비로봉이다. 신라 말 최치원은 종을 매달아 놓은 종루(鐘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 종루봉(또는 종대봉)이 바로 이곳이다. 그 이력처럼 수원시내와 광교저수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비로봉에서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토끼재와 만난다. 이 재에서 다시 소나무가 우거진 암릉을 올라서면 최정상 시루봉이다. 봉우리 모양이 마치 떡을 찌는 시루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봉우리엔 사람 키만한 석등 모양의 정상석이 자리잡고 있다. 시루봉은 주봉답게 사방에 시원한 조망을 펼쳐 놓았다. 군포의 수리산부터 의왕의 모락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때는 평택, 용인시가는 물론 서해의 섬들까지 가시권에 놓인다고 한다.

이제 일행은 노루목을 돌아 창성사 터를 거쳐 삼광교 버스종점으로 내려선다. 약 10㎞, 5시간에 걸친 여정이었다.

'아래'를 지향하는 산, 골(谷)은 역사와 풍수를 담는다. 그래서 산은 인문지리의 지역적 구분이 되기도 한다. 그 산이 군사적 요충지나 시민들의 구심처 역할을 했다면 그 비중은 더 커진다.

광교산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현대를 거치는 동안 호국의 진지(陣地)로, 불교의 요람으로, 문화의 산실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역사적 위상에 비추어 광교산이 수원의 주산으로만 남기에는 억울한 느낌이다. 이 산이 역사적으로 재평가 된다면 언젠가는 수도권의 명산으로 대접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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