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사업가의삶… 정태일 한국OSG 회장

입력 2011-07-02 08:00:00

영남에 신공항 있어야 합니다…대통령 앞에서도 할말은 하죠

정태일 회장이 절삭공구를 만드는 1층 공장에서 정밀한 절삭공구가 생산되는 라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태일 회장이 절삭공구를 만드는 1층 공장에서 정밀한 절삭공구가 생산되는 라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태일 회장과 아직도 순수한 소녀 감성을 지난 부인 김태생(1949년생) 씨의 포토 스토리책. 자녀들이 직접 만들어준 추억의 사진첩이다.
정태일 회장과 아직도 순수한 소녀 감성을 지난 부인 김태생(1949년생) 씨의 포토 스토리책. 자녀들이 직접 만들어준 추억의 사진첩이다.

'빛나는 하나의 별이 되라'그래서

뼛속부터 기계공인 검소한 기업가, 정태일(鄭台一:나라이름 정'별 태'한 일)'

1943년 7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만 2세가 갓 지날 무렵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폭탄이 터졌다. 며칠 뒤(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백기를 들었고, 대한민국은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아이는 한국인 부모를 따라 그해 10월쯤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으로 왔다. 다행히 아이는 원자폭탄이 터진 히로시마 외곽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원폭 피해는 입지 않았다.

만약 히로시마 한복판이 대구시청이라고 가정하고 거리를 산정하면 그 아이는 경산쯤에 살았기 때문에 원폭으로 인한 피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일단 광복이 되면서 대구로 왔지만 먹고사는 일은 막막했다. 하빈초등학교를 졸업한 이 아이는 씩씩하게 자랐다. 굳건했다. 초교 졸업 후 철공소에서 일했다. 잘했다. 그것도 부족해 춥고 배고픈 것을 참고 성광중'고교를 야간에 다녔다.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일하고, 오후 5시 30분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좋은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에 영남대 기계공학과 야간에 입학했다. 목표가 있었기에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됐다. 피땀 흘린 노력 끝에 그는 대구경북 CEO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됐다.(5년 전 지역 CEO들을 상대로 설문을 한 결과, 이인중 화성산업 회장과 9.1%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29일 오전 정태일 한국OSG㈜ 회장을 만나 한 남자와 사업가로서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일본OSG 뛰어넘은 한국OSG

어려운 환경을 딛고 영남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회사원 정태일은 현장의 오랜 경험과 실력을 인정받아 잘나갔다. 33세 때 인생의 위기이자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SK에 흡수되면서 정태일을 서울 개발부 차장으로 발령했다. 하지만 그는 지역을 떠나지 않기로 하고, 새 인생을 찾았다. 절삭공구를 만드는 일본OSG 회사의 한국 대리점을 맡게 되었으며, 4년간 종잣돈을 마련해 1980년엔 독자적인 한국 OSG를 설립했다.

한국OSG는 창업 이후 착실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2명으로 출발해 지금은 300명 가까운 식구가 함께 일하고 있다. 1991년부터는 일본에 역수출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다. 절삭공구를 국산화하고, 그 기술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연간 5천만달러 이상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고 있다.

"참 묘하죠. 그 당시 제가 서울로 갔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전 한국OSG를 맡을 운명이었나 봅니다. 당시 일본 OSG 회장이 2억원 상당의 기계를 헐값(5천만원)에 넘겨주면서 한국OSG를 설립하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만큼 기계공 출신인 저한테 믿음이 갔나봅니다. 이게 정해진 운명인가요?(허허)"

외형적인 성장만을 놓고 정태일 회장과 한국OSG를 평가하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는 이 회사를 30여 년간 경영하면서 단 한번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금융위기의 살인적인 파고도 슬기롭게 버텨냈다. 이런 경영철학과 내실경영이 알려지면서 정 회장은 지난 1월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간담회'에 초청돼 이명박 대통령을 감동시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라고 다시 한번 비결을 묻자,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회사에서 말 안듣고 농땡이를 치는 사람들이 평생 그런 줄 알죠? 절대 아닙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한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 역할이 있고, 또 세월이 지나면 혼신의 힘을 다해 회사를 위해 일할 때가 옵니다. 그게 세상 이치죠." 이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의 질문을 찾기 어려웠다.'기업인 정 회장'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됐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정 회장이 정적을 깼다. "회사가 일거리가 없어 어려울 때는 직원들에게 청소를 시키고 재교육을 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좋은 날이 오더군요."

◆검소한 기업인, 뚜렷한 소신

지역의 큰 기업의 오너 CEO이지만 그의 생활은 검소하다. 조금 심한 표현을 하자면 '짠돌이'란 평가도 듣는다. 그렇다고 인색한 것은 아니다. 다만 불필요한 돈을 쓰지 않을 뿐이다. 그는 지역의 기업인들 가운데 소신 발언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대통령 앞에서 신공항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강하게 역설했다. 그것도 이론적인 얘기가 아니라 아주 쉽게 쏙쏙 와닿는 얘기를 한다.

"수요가 있어야 공항이 있다고 말하는데, 바로 옆에(밀양) 공항이 생겼는데 미쳤다고 인천까지 갑니까? 1천300만 명 영남권 사람들에겐 신공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음 정권을 잡으려는 어떤 후보든 신공항 건설 재추진을 약속받지 않으면 절대 찍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역에선 계속 주장할 겁니다. 영남엔 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쉽게 말하는 것 같지만 결기가 느껴졌다. 정 회장은 비록 유치에 실패했지만, 이번 밀양 신공항 유치를 위해 지역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중앙정부를 가든 서울 대기업을 방문하든 어딜가도 소신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영남에 공항이 없어 얼마나 불편한 줄 압니까? 죽을 지경입니다."

그는 호기심도 많다. 회장실에는 이상한(?) 선풍기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타원형의 테니스라켓처럼 생긴 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가운데 손을 넣으면 테니스라켓같은 테두리에서 바람이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기술을 동원한 선풍기로 제법 가격도 비싸단다.(70만원 정도인데 60만원 정도로 깎아서 샀다고 한다.) 정 회장은 손자 3명에게도 신기한 장난감이나 발명품이 있으며 주저없이 사준다. "신기한 건 좋은 겁니다."

정 회장은 겸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쳐난다. 외국어(영어'일본어) 구사 능력은 물론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도 그의 강점이다.

그는 '정직'이란 단어를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어릴 때 아버지 지갑에서 '100환'을 슬쩍했는데 이를 알아챈 아버지의 말없는 실망을 절절하게 보고 난 뒤, 그는 두번 다시 남의 것을 훔치거나 부정하게 재물을 탐하려는 마음을 싹 비워버렸다고 한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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