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⑪칼을 뺀 삼성, 초유의 그룹 감사

입력 2011-06-27 09:38:03

"왜 우승 못하나" 질책성 감사

1987년 대구시민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삼성 박영길(왼쪽) 감독과 해태 김응용 감독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1987년 대구시민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삼성 박영길(왼쪽) 감독과 해태 김응용 감독이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삼성 라이온즈는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후에도 리그 최강의 전력을 유지했다. 이듬해인 1986년 삼성은 전기리그에서 우승했고 사령탑이 김영덕에서 박영길로 바뀐 1987년과 1988년에도 가을 야구에 초청을 받았다. 특히 1987년에는 초유의 팀 타율 0.300을 기록하며 전'후기리그 패권을 차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하지만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서 OB 베어스에 1승1무4패로 뒤져 원년 챔피언을 놓쳤고, 1984년 롯데 자이언츠에 통한의 패배(3승4패)를 당하며 패권을 거머쥐지 못했던 것처럼 큰 경기에 약한 삼성의 징크스는 계속됐다.

원년부터 시행된 전'후기 우승팀이 패권을 다툰 한국시리즈는 1984년 전기 1위 삼성의 파트너 고르기 사건으로 1985년 전'후기 종합승률제도로 변경됐다. 그러나 삼성이 전'후기를 독식하는 바람에 무산, 한국야구위원회는 1986년부터 전기 1위와 후기 2위, 후기 1위와 전기 2위가 크로스로 맞붙는 플레이오프제를 시행했다. 단, 전'후기 모두 2위 이내에 든 팀은 한국시리즈 자동 진출권을 가져갔다. 지금과 같은 단일시즌제가 정착된 것은 1989년이다.

1986년 전기 우승팀 삼성은 후기서 4위에 그쳐 후기 1위 팀 OB(전기 4위)와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놓고 플레이오프를 치러 3승2패로 승리했다. 한국시리즈서는 전'후기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한 해태 타이거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1대4 패배. 삼성은 1987년 전'후기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지만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온 해태에 또다시 0대4로 무릎을 꿇었다. 1988년엔 후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빙그레에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0대3으로 패해,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제패의 꿈이 무산됐다.

화가 난 건 팬들뿐만이 아니었다.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삼성그룹의 자존심이 만신창이가 됐다. 삼성이 칼을 빼내 들었다. 1988년 시즌 후 라이온즈에 프로구단 최초로 그룹 비서실 감사가 단행됐다.

"당시 그룹 비서실장이 단장을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물었다. '왜 우승을 못하느냐? 대책은 있느냐?' 그러나 답답한 건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단장은 '대책이 없다'고 답했다." 김종만 대구시야구협회장(당시 경기과장)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한 뒷심 부족, 여기에다 단장의 자신 없는 대답은 대대적인 감사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감사는 일주일간 계속됐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대구시청 인근에 숙소를 차린 감사팀을 찾아가야 했다. 이성근 운영팀장은 "시청 근처 여관에 갔을 때 다른 선수는 없었다. 면담은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진행됐다. 주로 물은 질문은 '우승을 하려면 뭐가 필요하냐?'였다"고 했다.

폭풍이 몰아쳤다. 임기를 1년 남겨둔 박영길 감독은 옷을 벗었고, 그 자리를 정동진 수석코치로 채웠다. 우승을 못한 책임을 감독이 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관계자는 "호쾌한 공격야구를 이끈 박 감독의 능력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한국시리즈 직행을 예약한 뒤 잔여 경기서 해태에 모질지 못했던 게 무시무시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해태 김응용 감독과 친분이 두터웠던 박 감독이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가 불투명한 해태를 제압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삼성은 해태와의 마지막 2경기에서 패하며 해태의 후기 2위를 도운 꼴이 됐다. 결국 삼성은 OB를 꺾고 올라온 해태의 기세에 눌려 한국시리즈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0대4의 패배를 당했다. 해태전에 전력을 다했다면 손쉽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을 거란 말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사자(삼성)가 범(해태)을 봐주다 잡아먹힌 꼴이 됐다고 수군거렸다. 강단지지 못했던 박 감독의 태도가 그룹 고위층에도 말이 들어갔을 것이고 1988년 감사가 그를 감독직에서 끌어내리는 시점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감사팀에는 김대훤 씨가 속해 있었다. 그는 박영길 감독의 은사였던 김계현 전 한국전력 감독의 아들이었다. 한전 시절 감독과 선수로 함께 있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김 감독의 관사에 자주 들락거렸으니 박 감독과 김대훤 씨 역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가 속한 감사팀에 의해 박 감독이 옷을 벗었으니 박 감독은 스승의 아들에게 철퇴를 맞은 꼴이 됐다. 김대훤 씨는 시간이 흐른 1995년 라이온즈 단장에 올라 이듬해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

삼성은 이 감사를 통해 구단 장기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재창단'도약을 준비했다. 5년간 500억원을 투자해 명문구단으로 거듭날 수 있는 청사진을 밝혔다. 부대사업으로 삼성레포츠센터를 건립하고 대구시와 협조를 통해 전용구장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도 내놓았다. 그리고 '2등은 의미가 없다'는 삼성은 감사 뒤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라는 거대한 후폭풍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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