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 비극… 담뱃갑에 쓴 첫 편지 받고 두번째가
"전사 통지서를 받고도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 같아서 한참을 기다렸어. 남편이 죽었다고 믿지 않았던 거지."
24일 오후 3시 대구 중구 남산동 다가구 주택 1층 김차출(81·사진) 할머니의 안방에는 손때 묻은 재봉틀 한 대가 있다. "나랑 같이 늙었어. 60년도 더 됐지." 재봉틀은 그가 18세에 시집 올 때 가져온 혼수품이었다. 6·25 전쟁터에서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남편 이광락 씨 대신 할머니는 바느질을 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바느질 일을 하며 시동생 2명을 장가보냈고, 외아들 대학 공부까지 시켰지만 지금도 남편의 그늘이 그립다고 했다.
1950년 가을, 전투기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대구 팔달교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였다. 남편이 복무 중인 부대 소대장이 팔에 붕대를 감은 채 김 할머니를 찾아왔다. 소대장은 손바닥만한 담뱃갑과 군복 입은 남편 사진 두 장을 건넸다. "전쟁 통에 종이가 있었겠나. 남편이 담배 껍데기에 편지를 쓴 거야.'어른들 잘 모시고 조금만 더 고생하라'며 군번이랑 같이 적어 보냈어." 담뱃갑은 남편의 마지막 편지였다.
1951년 8월 그렇게도 기다리던 두 번째 편지 대신 전사통지서가 날아왔다. 강원도 고성지구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식구들은 아무도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이 적어 보낸 군번과 전사통지서에 나와있는 군번 끝자리가 달랐다. 몇 년 뒤 집으로 유골 상자가 배달돼도 시부모님은"내 자식은 죽지 않았다"며 상자를 돌려보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됐다. 당시 3살난 아들을 등에 업고 바느질거리를 구하러 다녔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시어머니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중풍을 앓던 시아버지도 4년 뒤 숨을 거뒀다."다 없이 살던 시절이었지만 돈 없는 것보다 남편이 없는 게 더 서러웠어." 밤잠을 아껴가며 재봉틀을 돌려 한복 만들고 바느질했다. 아들 이상용(62) 씨가 영남대 토목과에 입학할 때 첫 학기 등록금 2만원도 그렇게 마련했다. 한복 한 벌을 만들면 몇십원을 손에 쥐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보훈청에서 연락이 왔다."이광락 씨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소식이었다. 예전에 가족들이 돌려보낸 유골이 그곳에 묻혔고, 김 할머니는 전사통지서에 적힌 군번을 다시 확인한 뒤 남편 죽음을 인정했다. 눈물마저 메말랐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도 슬픔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아들이 결혼해 2남1녀를 낳고 큰 손자가 32살이 됐지만 일생을 함께하지 못한 남편을 향한 그리움은 60년 전 그대로다. 김 할머니는 1년에 두세 번씩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남편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을 찾아간다." 지금도 보고 싶지. 왜 안 보고 싶겠어." 요즘 세대에게 6'25전쟁은 책 속의 역사지만 김 할머니에게는 지금도 살아있는 아픔이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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