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事二君'은 신하와 선비의 도리…고려, 조선, 抗日로 이어졌다
'내 비록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상은 받지 않겠다' 경북 선비들의 절의정신을 거론하자면 멀리 1,600년 전 신라시대 박제상의 충절부터 떠올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박제상은 나라와 군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충군절의의 표상으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제상은 왜(倭)에 볼모로 가있던 아우를 구출하라는 눌지왕의 명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왕제(王弟)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키지만 자신은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박제상은 그러나 '신라의 신하임을 끝까지 고집하면 비참하게 죽일 것이오, 왜의 신하가 되면 큰 상까지 내릴 것'이란 왜왕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조국 신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가 모진 고문과 참혹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경북 선비의 절의정신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여말(麗末)의 삼은(三隱)에 의해서다.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창건이라는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개혁적 관료이자 학자였던 경북의 신흥사대부는 두 진영으로 갈렸다.
보다 급진적인 개혁파들은 아예 새로운 왕조 건설에 나섰지만, 온건 개혁파들은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 삼은(三隱)이 그 대표적인 절의지사이다. 여말 삼은으로 꼽히는 또다른 인물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또한 경북 성주인으로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비이다.
이제현의 제자로 외가인 영해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올랐던 이색은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예를 다해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고사했다.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며 선비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영천 출신인 정몽주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선죽교에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정몽주의 죽음은 이성계의 역성혁명론에 맞서 고려 왕조 안에서 개혁을 도모하려던 체제수호론의 패배를 뜻한 일대 사건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오히려 역성혁명 세력의 중심인 이방원(후일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기 위해 이방원이 읊었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는 1천 년이 지나도록 그 의미가 새롭다.
당대의 학자인 이색과 정몽주 권근 등을 만나 정주학(程朱學)에 침잠했던 길재도 고려의 멸망이 목전에 닥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길을 택했다. 동문수학했던 많은 관료들이 조선왕조에 합류했고, 스승이었던 권근마저 새 왕조에 출사를 한 상황이었지만, 길재는 자신이 배우고 가르쳤던 신하의 도리와 선비의 덕목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인 선산으로 낙향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후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학문적 동지이자 동시대에 관직생활을 했던 정치적 동료였던 이방원의 간곡한 요청에도 끝내 출사를 하지 않았다.
길재는 금오산 기슭에 서재를 열고 그동안 갈고닦은 학문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데 전념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간 그는 학문적 대의와 선비의 양심을 지킨 학자이자 스승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스러져가는 고려왕조를 부둥켜안고 순절한 정몽주와 함께 길재는 만인의 스승으로 만고의 충신으로 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것이다. 또한 길재로 인하여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이자 인재의 고장이 되었다.
15세기에 이르러 경북 선산은 온나라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는 문향(文鄕)으로 명성을 날렸다. 조선 후기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였던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일선(선산)에 있다'고 했을 정도이다.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벌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육신(死六臣) 하위지(河緯地)와 김시습'조려 등과 함께 비운의 군주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이 모두 선산 출신인 것도 길재의 불사이군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경북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절의적(節義的) 기질이 특히 강했다. 정주학의 실천적 수용을 각별히 강조하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경북의 선비들이 조선초기 이래 집권세력인 훈구척신 세력과 곧잘 충돌하는 양상을 띤 것도 이 때문이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했던 조선 왕조도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뒤이은 중종반정으로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얼룩지고 말았다. 이같이 왜곡된 현실을 가장 먼저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김종직(金宗直)이었다.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에게 수학한 김종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를 비판했다.
이 글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해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은근히 비난한 것이다. 이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구실이 되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을 파헤쳐 송장의 목을 베는 형벌)되고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적어넣었던 제자 김일손도 참수되었으며, 정여창'김굉필은 귀양을 가는 등 많은 사림들이 희생되었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는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에 이르는 60여 년간, 16세기 정치사를 결정지었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국면에서 영남출신 사대부들의 피해가 극심했던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경북 선비들의 절의정신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때는 의병으로 표출되었으며, 한말(韓末) 국운이 기울고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자 다시 의병항쟁과 자정순국 그리고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이다 재판에 회부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아예 변론을 거부했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지 않겠다'는 조선 선비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구감옥에서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두 아들까지 항일투쟁의 제단에 바치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선비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
김창숙은 해방 후에도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했으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오면서도 죽는 그날까지 절의와 지조를 지켰던 김창숙은 경북의 마지막 선비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경북인이 보여준 강한 절의정신은 이렇듯 오랜 역사적 연원에서 유래한다. 경북의 선비는 그렇게 늘 우리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경북의 선비야말로 곧 한국의 선비였던 것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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