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32)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중)

입력 2011-06-23 14:31:41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했다. 파독 근로자들을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목적은 독일로부터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더 빌려오고, 그와 함께 독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12월 10일 오전,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을 방문해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탄 차가 강당에 도착했다. 인근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300여 명과 뒤스부르크와 에센 간호학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5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대통령 일행이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으나, 모두들 우느라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할 정도였다. 마이크를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나는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중략)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광부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와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온통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한 것은, 이들을 볼모로 차관을 끌어다 써야 하는 괴로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서독의 수도 본에서 에르하르트 총리와 단독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먼저 말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은 총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강하지 못해 세계를 몰랐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 독일에 와서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고, 우리도 독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강국이 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서독 정부의 지원을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각하, 일본하고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이 말을 통역해 준 백영훈 교수에게 화를 냈다. "뭐, 돈 좀 꿔달라는데 일본 이야기는 왜 꺼내?"

에르하르트 총리는 대통령의 표정을 통해서 감을 잡은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각하,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마흔두 번이나 전쟁을 했소. 그런데 아데나워 총리가 드골과 만나 악수를 하면서 이웃 나라끼리 손을 잡았소.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 하더니, 이번에는 오른손 바닥을 왼손 등 위로 내려치며 "우리는 항상 눌려 지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뒤에도 한동안 말씨름이 이어졌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인자한 표정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발전을 이루세요. 그래서 우리 합심해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감격한 표정으로 총리의 손을 잡았다. 그 뒤 담보가 필요 없는 재정차관 2억5천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도 한국을 지원해 줄 것을 여러 차례 간곡하게 부탁했다. 1966년 한국 정부는 서독과 정식으로 특별 고용계약을 맺고 간호사 3천 명과 광부 3천 명을 파견했다. 그리하여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가 7천932명, 간호사가 1만226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방문을 통해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속도로 건설과 새마을 운동을 비롯한 농촌개조 운동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오원철은 말하기를 "특별보좌관들과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농촌의 경지정리, 농어촌 전화(電化) 사업, 간이상수도 설치, 지붕개량 등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대통령의 구상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지시가 떨어졌다. 그 대부분의 사업이 1964년 말 서독 방문에서 얻은 영감과 결심에 연유하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 방문을 통해 자신의 꿈을 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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