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의 남녀, 그들을 덮쳐 오는 '일상의 쓰나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와 떨어져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고려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열대의 섬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떠났다. 나는 그가 금방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그가 사표를 던진 직장에 힘을 써서 휴직처리가 되도록 조치했다. 그가 한 번도 입지 않은 겨울옷을 해마다 세탁해 옷장을 정리했고, 그의 신발을 늘 들어오는 방향을 향하도록 놓았다. 지금이라도 딩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그가 돌아오면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휴가 때마다 나는 남편이 있는 발리섬으로 찾아가 함께 지냈다. 남편은 폭죽이 터지듯 맑고 하얗게 웃는 원주민 계집아이를 '서번트(식모)'로 고용해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했다. 서번트는 감히 '주인'인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를 하인처럼 대접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그 여자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그녀가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을 먹도록 권유했다. 아이는 고작 몇 숟가락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이가 토하는 소리가 식탁에 앉은 우리 부부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냥 놔두지 그랬어…."
남편은 그 와중에도 수프를 떠먹으며,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내게 말했다.
"먹기 싫어서 그런 줄 몰랐지."
그날 나는 남편에게 그 아이를 내보내라고 말해야 했었다. 싼값으로 구할 수 있는 서번트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러나 낯선 음식을 못 먹는다고 내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를 내보내야 할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으나,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날 나는 하루종일 께름칙한 기분으로 아이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냥 놔두지 그랬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던 남편. 뜨거운 김과 줄줄 흘러내리는 땀에 감추어졌던 표정. 그러나 그 얼굴은 혹시 말하고 있었을까. 이제 그만 날 좀 놔 줄래…. (중략)
나는 이듬해 여름에도 휴가를 내고 남편이 있는 섬으로 갔다. 남편의 침대에 누워 있던 서번트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죽이고 싶다. 죽여야 한다. 그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내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칼을 들었을 때 서번트는 불룩해진 배를 안고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과일을 깎아 드릴까요. 마담?"
김인숙의 신간소설 '미칠 수 있겠니'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한 여자가 만난 사람과 사랑, 거기에 지진해일이라는 거대한 자연재해를 교차하며 전개한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남편과 여자 서번트는 자연재해와 같은 성질의 무엇으로 읽을 수 있겠다. 사랑을 잃고 사람을 잃은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고, 지진해일로 재산과 직장,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 역시 살아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어째서? 왜? 대체 뭘 기대하고?
소설은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진(아내)과 아내의 품을 떠나 섬으로 가버린 남편 유진, 남편의 서번트로 일하는 원주민 여자아이와 그녀를 사랑한 남자아이, 주인공 진이 섬을 방문했을 때 택시 드라이버이자 관광 가이드 노릇을 해준 이야나. 의붓어머니가 속히 죽어서 유산이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만의 이야기가 살인사건과 지진해일 속에서 교차하며 펼쳐진다.
'미칠 수 있겠니'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기 마련인 일상(사랑, 집착, 오해, 미움, 두려움, 배신 등)과 더불어 결코 만나고 싶지 않으나 한번쯤은 맞닥뜨리고 마는 참혹한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참혹한 현실은 지진해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쟁, 기아, 생이별 혹은 전염병의 창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질문은 '인생이 뭔데?' '왜 그렇게 사는데?'로 귀착된다. 소설 속 인물 수니가 옛사랑 이야나에게 묻는다.
"사랑이 뭔데?"
이야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똑같은 이유로 한 사람을 증오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일까? 하나의 답은 되겠으나 포괄적인 답은 아니다. 사랑은 진돗개의 이마에 솟아난 두 개의 뿔이다. 302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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