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나키스트에게(박시교 지음/고요아침 펴냄)

입력 2011-06-23 07:12:12

"찰나를 살다가 가는 우리 인생도 어차피 아나키스트"

197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박시교 시인이 시집 '아나키스트에게'를 펴냈다. 그의 아나키스트는 누구일까. 시집을 살펴보아도 흔히 아나키스트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정치적 느낌과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시인은 태어나서 찰나를 살다가 죽고야 마는 우리인생을 아나키스트에 비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놓아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나의 아나키스트여- 전문.

시인은 중국 사상가 노자와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듯도 하다.

'발이 되지 않는/ 돈 과도 담을 쌓은/ 시 앞에서/ 나는 때로/ 한없이 오만해진다/ 세상에/ 부릴 허세가/ 이것밖에/ 없어서' -가난한 오만- 전문.

박시교의 시는 어렵지 않다. 복잡한 용어도, 수사도 없다. 그럼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시가 문자(文字)가 아니라 그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 보이고, 두 번째 읽을 때 명확했던 것이 세 번째는 달리 보인다. 그러니 그림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문학평론가 구중서는 '시인이 끝내 귀의하는 경지는 계곡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있는 안빈이다. 막상 이 대목에서 알게 되는 것은 스스로 솟구치는 리듬을 격조로 다듬은 시조라는 것이다. 자유시를 성취한 그 위에 있는 시조, 박시교 시인은 오늘날 한국 시조의 아나키스트다'라고 평가했다.

'햇빛이 그 비늘을 털고 있는 봄날 아침/ 뜬 눈으로 지샌 비나리(경북 봉화군 청량산 아래 마을)에서/ 비로소 나는 보았다 (중략) 이 아침 밀려오는 허허로움은 무엇인가/ 지금껏 나를 지탱해 온/ 저 푸른 고향 산 빛이/ 뜻 모를 눈시울에 얼비쳐/ 낯설기만 한 것은' -비나리의 아침- 중에서. 83쪽, 8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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