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기행] <26>경주 서남산 가는 길

입력 2011-06-22 07:14:30

원효대사-요석공주 '3일간의 사랑' 간직한 러브로드

이 길의 종착지인 삼릉은 신라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묻힌 곳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상선암으로 발길을 돌리면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완성한 용장사가 나온다.
이 길의 종착지인 삼릉은 신라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묻힌 곳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상선암으로 발길을 돌리면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완성한 용장사가 나온다.
삼릉을 바로 앞에 두고 태전지 연못이 있다. 삼릉의 울창한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 같다.
삼릉을 바로 앞에 두고 태전지 연못이 있다. 삼릉의 울창한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 같다.
이 길에서 만난 남간사지당간지주. 통일신라때의 것으로 추정되며, 부드럽고 소박한 형태를 갖고 있다.
이 길에서 만난 남간사지당간지주. 통일신라때의 것으로 추정되며, 부드럽고 소박한 형태를 갖고 있다.
경주 배리마을의 고택. 서남산 가는길 곳곳에는 이 같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경주 배리마을의 고택. 서남산 가는길 곳곳에는 이 같은 고택들이 즐비하다.

경주의 모든 길은 월성에서 시작된다.

월성에서 시작된 이 길은 남산을 왼편으로 끼고 남으로 쭉 뻗어 삼릉으로 이어진다.

이 길에는 박혁거세가 탄생하고 월성에 앞선 초대 신라의 궁궐터였던 창림사지가 있으며,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포석정이 있다.

'서남산 가는 길'은 신라천년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길이다. 천년을 이어온 이 길을 따라 신라의 예술이 화려한 꽃을 피웠다. 신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모두 이 길에서 탄생했다.

경주 위덕대학교 신상구 교수(국어교육전공 주임'문학박사)는 "월성에서 시작돼 모차골을 지나 용연과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왕의 길'이 정치와 호국의 길이었다면 '서남산 가는 길'은 신라의 예술혼과 신라의 모든 사랑이야기를 간직한 '사랑의 길'"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그랬고,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사랑,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사랑,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 바람난 어머니를 위해 개울에 돌을 놓았다는 효불효교의 이야기, 설씨녀와 가실의 변하지 않는 사랑 등이 이 길을 통해 이뤄졌다.

월성에서 서남산으로 가는 7.4㎞는 '러브로드'로 불린다.

◆월정교와 일정교의 사랑

반월성(월성)을 출발, 남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남천을 가로질러 월정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 길 뒤로는 계림과 첨성대, 안압지 등이 있고 동쪽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길은 과거 신라의 최고 번화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교 복원현장에서 박물관 쪽으로 남천의 물길 형태를 보니 월성이 왜 반월성으로 불리는지 알 수가 있다. 물길이 휘돌아 나오는 모양이 꼭 반달 모양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이 길에서 비롯됐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난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는다. 원효의 인물됨을 알아본 무열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를 떠올리고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들이라고 명한다. 무열왕의 의중을 알아차린 관리는 월정교에서 원효를 만나 그를 다리 아래로 떠밀어 옷을 버리게 했다.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파계였으나, 인간 원효에게는 속세에서 한 번뿐인 꿈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 뒤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 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의 한 분인 설총을 낳았다.

경주시는 현재 월정교 복원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내년 말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담긴 월정교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월정교 인근의 일정교(일명 효불효교(孝不孝橋))도 과부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일곱 형제가 야밤에 남천을 건너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러 가는 홀어머니가 안쓰러워 다리를 놓았다는 사연이다. 일곱 형제가 만들었다고 해서 칠성교로도 불리는 이 다리는 가운데 교각의 석재 5개가 차례대로 쓰러진 채 남아있는 등 교각 부재 630여 점이 발견돼 이 같은 설화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천원마을

국립경주박물관과 오릉의 사이 길인 이 길은 남천을 배수로 하고 남산이 시작되는 점이기도 하다. 남산을 지척에 두고 꽤 너른 도당산 자락이 시작된다. 천원마을이다. 행정구역은 경주시 교동이다.

도당산은 청년시절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김유신은 천관이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져 지내다가 어머니의 꾸중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어느 날 말이 술 취한 김유신을 천관의 집에 데려가자 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친다. 이를 슬퍼한 천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준다.

현재 천원마을의 밭두렁에는 천관사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천관사 터에서 재매정이 있는 장군의 집터는 그리 멀지 않다. 고개만 살짝 들면 보이는데, 가깝지만 가까이할 수 없었던 사랑이 두 연인의 집터 위에 아련히 맴돌고 있다.

또 김춘추와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의 사랑 이야기도 이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유신의 집에서 이뤄졌다.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오줌을 누었는데, 서라벌이 온통 오줌에 잠기더라는 꿈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보희의 꿈을 비단 한 필로 산 문희는 후에 문명왕후가 된다. 가야계 출신의 정통 진골이 아닌 문희가 '신데렐라'처럼 왕비가 되는 사연도 이곳에서 벌어졌다.

도당산 3부 능선쯤에 오르면 월성과 율리(현재 율동)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도당산에서 오 리가량 벗어난 율리마을에 전해져 오는 가실(嘉實)과 설씨녀(薛氏女)의 사랑 이야기도 순수하고 애틋한 신라인들의 연애관을 엿볼 수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설씨녀의 아버지가 정곡(正谷)을 방위하는 부역을 나가게 되었는데, 설씨녀를 사랑한 가실이 설씨녀 아버지의 병역을 대신하고 6년 만에 돌아와 설씨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는 국방의 의무와 가실의 인정, 설씨녀의 의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신라의 한가운데서 만난 조선시대 유적

천원마을을 지나 탑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엔 사랑과 잉태의 길답게 각종 열매가 지천이다.

마을 이름이 식혜골이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개망초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식혜골로 이어지는 탑동의 너른 들판을 적시는 개울에는 지금은 보기 힘든 민물 말이 물살을 따라 하늘거리고 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복숭아 개복숭아 오디 대추 배 자두 무화과 밤 매실 등이 막 열매를 맺었다.

길에는 다 익은 오디 열매가 떨어져 새까맣다. 밟히지 않은 오디를 주워 입에 넣으니 달콤쌉쌀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산딸기도 빨갛게 익었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다.

소형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것 같은 마을길을 따라 배동마을로 들어서니 임짐왜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호 장군 고택이 나온다. 신라 유적이 즐비한 이 길에서 만난 유일한 조선시대 유적지다.

김호 장군 고택은 임진왜란 때 경주 노곡(奴谷)에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호(1534~1592)가 살았던 집이다.

경주시 문화관광과 박옥순 담당은 "사랑과 예술은 일맥상통한 것 같다. 이 길을 따라 수많은 예술인들이 거쳐 갔으며 아직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길에서 작품을 생산해 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 장군 고택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누비장 김해자 선생이 운영하는 누비공방이 있으며, 자연염색 규방공예가 김미아 선생, 동국대학교 미대 김호연 교수, 수묵화 대가 박대성 화백, 문동욱 만파식적 보존회장, 최훈식 경북도 환경미술협회장이 이 길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아달라왕이 묻힌 삼릉

식혜골을 뒤로하고 산길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 한참 내려오면 길 한가운데 우뚝 솟은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보인다. 남간사 옛 절터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논 가운데 동서로 세워진 화강석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남간사와 관계되는 당간지주로, 규모나 수법이 간단하고 부드러운 소박한 형태를 갖춰 신라인들의 여유를 엿볼 수 있다.

길은 남북으로 곧게 뻗어 있으나 남산 산길을 피해 들길 가운데로 나있어 그늘이 없는 게 흠이다. 동네 아이들이 마을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이 정겹다. 마을을 뒤로하고 포석정을 눈앞에 둔 들판에 창림사지가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절터로 지금도 굄돌에 새김이 선명한 초석들이 남아 있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남산 서쪽 기슭 지금의 창림사지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과 같다 해서 아이의 성을 박(朴)이라고 했으며, 여자 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부인이라고 지었다.

이것을 통해 이곳이 신라 최초의 궁궐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림사지를 지나면 포석정 숲길이 시작된다. 신라 6대왕 지마왕릉을 지나면 삼불사가 있고 그 옆에 전통찻집 금오산방이 나온다. 얼음을 띄운 오미자차 한잔에 더위와 피로가 한꺼번에 싹 가신다.

금오산방 주인 이경숙 씨는 "몇 해 전부터 우체통에 산새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부화했다"고 자랑했다.

우체통 안에는 갓 부화한 산새 3마리가 어미새에게 먹이를 달라며 재잘거린다.

삼릉이 가까워 올수록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무를 이룬다. 삼릉에서 상선암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남산으로 오르면 매월당 김시습이 완성한 금오신화의 무대인 용장사로 통하는 길이다. 이 길에서 김시습이 28살(1462년)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남산 용장사 근처의 금오산실이란 집을 짓고 7년을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가 완성된다.

◆경주시 러브로드를 꾸미다

경주시는 이 같은 역사 속의 사랑 이야기를 테마로 한 '러브로드-서남산 가는 길'에 대해 주변 유적지와 어울리는 탐방로를 개설한다.

김기열 문화관광국장은 "그동안 이 길은 우수한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탐방로의 부재와 문화재 정비 및 가로환경 조성이 미비해 접근성이 떨어졌다"면서 "이 길은 신라의 예술과 혼, 사랑이 깃든 길이다. 단순한 정비를 벗어나 이야기가 있는 역사 탐방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상구 교수는 "경주시는 국도35호선으로 끊어진 부분에 대해 지하 통로를 개설하고 마을길로 이어진 현재의 길을 남산자락으로 옮겨 전 구간이 숲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경주'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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