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 우암산 어우러진 절경…흰소나무 많았다고 마을이름 따
소백산맥 남쪽 기슭 봉화 국망봉(해발 1,490m)과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영주, 안동, 문경을 거쳐 예천에서 태극 모양의 회룡포를 만들어낸다. 이 물길은 다시 문경 황장산에서 발원한 금천을 문경 영순면에서 받아들인 뒤 예천 용궁면 남쪽, 풍양면 삼강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 등 세 물길이 한데 모이는 곳이 바로 삼강이다.
내성천이 영주, 안동, 문경을 거쳐 서쪽 회룡포로 향하는 지점의 남쪽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백송(白松)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에는 내성천이 마을을 감싸 동에서 서로 흐르고 바로 안쪽 내성천변에 세 봉우리로 이뤄진 삼봉산이 솟아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석교산과 우암산이 각각 둘러싸고, 서쪽으로는 건지산과 운봉산이 에두르고 있다. 또 남으로는 난산(卵山)을 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난산 앞 들판은 알미들이라고 한다.
옛날 예천군 위라면의 작은 성(지성; 枝城)이었던 백송은 입향조가 마을을 개척할 때 흰소나무가 있었다고 '흰소리, 흰쇠리, 백송' 등으로 불렸다.
입향조는 바로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굉이었다. 입향조의 아들은 내성천과 우암산이 부딪치는 절벽에 정자를 지어 학문을 닦고 풍류를 즐겼다. 맑은 물과 소나무 숲, 절벽이 어우러져 신선이 노닐었다는 이 선몽대를 배경으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진성 이씨 입향조가 마을에 뿌리를 내린 이후 많은 인물과 박사들이 나와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빼어난 산수에 걸출한 인물이 어우러진 마을이 바로 백송이다.
◆입향조와 흰 소나무
백송에 처음 들어온 이는 함양 박씨 박수구였지만, 마을을 개척해 터전을 이룬 이는 진성 이씨 이굉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함양 박씨들이 조선 초 백송에 들어왔다 2대를 살다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겼다.
이재환(76) 씨는 "함양 박씨가 여기 들어와서 2대를 살다 나갔어요. 묘소만 여기 있고, 자손들은 예천군 개포면 금동이라는데 산다"고 말했다.
이오교(65) 씨도 백송마을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함양 박씨는 1423년도에 성주에서 일로(이곳으로) 오셨어요. 박수구라 카는 어른이 여진족을 물리친 공으로 소희장군에 봉군 되셨거든요. 그 어머니는 밀양 박씨였어요. 함양 박씨 재실은 저 삼봉산 밑에 있어요. 그분들이 양대, 그러니까 한 40년 살다가 예천군 개포면 금동으로 가셨다고 해요."
그리고 100년이 훌쩍 넘은 뒤 1539년쯤 진성 이씨 이굉(李宏; 1515~1573)이 백송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굉은 퇴계 이황의 둘째 형인 이하의 둘째 아들이다. 퇴계의 조카인 것이다.
퇴계의 조부,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 1488~1524)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진성 이씨 집성촌의 입향조이다. 노송정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뒤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노송정의 맏아들이 이식이고, 이식의 자녀 7남1녀 중 둘째가 이하, 막내아들이 이황이다. 이식의 맏아들이 후손을 잇지 못해 이하가 종손이 됐고, 이하의 둘째아들이 이굉이다.
이굉이 백송마을을 처음 개척할 당시 흰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을 백송으로 불렀다고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희귀수종인 백송은 조선초기인 1400년대 초반 중국 명나라와의 교류과정에서 들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나무껍질이 큰 비늘처럼 벗겨져 밋밋하고 흰 빛이 돌아 백송 또는 백골송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재환 씨는 "잎사구는 새파랗고, 잎사구에서 나온 대궁이 하야스롬한 솔이 있어. 옛날에는 많았는데, 지금은 구경을 못해요. 종갓집에 하나 심어 놨어. 그래서 동네 이름이 흰소리, 흰쇠리, 행소리 하다 백송이 됐지"라고 말했다.
백송의 흰소나무는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도 진성 이씨 재실에 심어놓은 자그마한 백송 한 그루는 마을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선이 노닐던 선몽대
맑은 하천이 쉼 없이 물길을 흘러내리고, 넓은 백사장은 백금처럼 고운 모래 빛을 뿜어내고 있다. 수백 년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하천을 둘러싸고 있다.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닐고, 기러기가 풍부한 먹이를 먹고 평평한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곳이다.
선몽대(仙夢臺).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의 넓은 백사장이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다.
입향조 이굉의 아들인 우암 이열도는 선몽대를 세우기 전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정자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내성천의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신선이 노닐만한 경치라고 선몽대라는 설도 있다.
선몽대는 백송 입향조인 이굉의 아들 이열도가 1563년(조선 명종 18년) 창건했다. 우암은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이기도 했다. 우암은 관직생활을 하는 도중 불합리한 관리의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관직을 그만두고 백송마을에 내려와 정자를 짓게 됐다고 한다.
이재환 씨는 "(우암) 어른이 과거에 급제를 하고 관직생활 하시다가 도백, 요즘 말로 도지사가 사적으로 볼일을 부탁하니까, 이 양반이 '나는 공적으로 당신이 날 시키는 건 몰라도 사적으로 시키는 것은 못하겠다' 그러고 사표를 내고 여(기) 와서 선몽대 정자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고 말했다.
선몽대에는 퇴계를 비롯해 서애 유성룡, 약포 정탁,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내성천의 추억과 풍광
마을 북쪽을 감싸 안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펼쳐놓은 내성천은 백송 사람들의 쉼터이자, 생활터전이다. 보드라운 모래가 빛을 받아 백금처럼 빛난다고 내성천을 낀 백송마을을 백금마을이라고도 했다.
백송마을을 둘러싼 내성천변 백사장은 평평하고 넓게 펼쳐져 길이는 십리에 이른다고 '평사십리'(平沙十里)라고 한다. 풍수지리상으로는 기러기가 내성천의 풍부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형이라고 해 이곳을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명당이라고 부른다.
진성 이씨 후손들은 우암산과 내성천이 빚어낸 절벽에 선몽대를 비롯해 학심대, 방학정 등 누각과 정자를 세웠다. 내성천과 맞붙은 우암산 기슭에는 100~200년 수령의 장대한 소나무를 비롯해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서식하는 숲을 이루고 있다.
보드라운 모래와 시원한 소나무숲 그늘은 예전부터 백송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의 발길을 모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내성천변은 여름철 모래찜질과 강수욕장이 됐고, 동네 씨름장이 되기도 했다. 짚으로 엮은 공으로 손야구를 하는 '찡꽁' 놀이도 어른들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반두로 모래무지나 쏘가리 등 물고기를 잡거나 강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이한주(69) 씨는 "반도(반두) 카는 거로 고기 따라다니면서 잡았어. 모래무지가 모래 속에서 딱 잡히고. 내성천은 물놀이도 하고, 고기도 잡고, 모래찜질도 하면서 사람들이 항상 많이 모였지"라고 말했다.
선몽대 주변 내성천 지형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상당부분 바뀌었다. 내성천 변 소나무 숲이 지금보다 훨씬 더 우거졌으나, 정부에서 빨치산을 찾아낸다고 상당수 소나무를 베 냈다는 것. 내성천변 모래톱이 지금보다 높이 돋아있었는데, 나무가 많이 없어져 모래가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많이 깎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백송마을 내성천변에는 소나무 그늘과 넓은 모래사장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백송마을은 이제 백송은 사라졌지만, 대신 우거진 소나무숲과 은빛 백사장을 배경으로 여전히 자연과 사람이 잘 어우러지는 명당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김수정'이가영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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