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학원 강사들 눈에 비친 대구 영어 사교육

입력 2011-06-21 07:32:59

영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지역 외국인 강사 수도 덩달아 늘고 있다. 그들의 눈으로 본 한국 학생들의 모습은 어떨까. 아담, 로스, 니콜, 제임스, 제이슨 씨(왼쪽부터) 등 외국인 강사들은
영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커지면서 지역 외국인 강사 수도 덩달아 늘고 있다. 그들의 눈으로 본 한국 학생들의 모습은 어떨까. 아담, 로스, 니콜, 제임스, 제이슨 씨(왼쪽부터) 등 외국인 강사들은 "한국 아이들이 여러 학원을 다녀 안쓰럽기도 하지만 배우려는 노력만큼은 대단하다"며 칭찬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눈에 띄는 외국인이라곤 미군이나 성직자 정도이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젠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게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아시아 각국에서 찾아든 노동자들과 학원 강사 등 일자리를 찾아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영어 사교육 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영어 학원들이 앞다퉈 생겨났고 외국인 강사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외국인 강사들이 국내 영어 교육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 특히 대구의 학생과 학부모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대한민국의 교육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또 외국인 강사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18일 대구시외국어교육협의회 주최로 350여 명의 외국인 강사들이 참석한 '20011년 외국인 강사 연수'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엄청난 교육열, 학생들에겐 짐

"학생들이 부모들 때문에 주눅이 든 것 같아요."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 투자는 외국인 강사들 눈에도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 있어 학부모의 열정만큼은 인정할 만하지만 자녀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아일랜드 출신 레이첼 해리슨(23'여) 씨는 9개월째 대구에서 생활 중이다. 그가 영어 강사로 생활하며 돌아다닌 곳은 유럽, 북미, 아르헨티나, 중국 등이다. 아시아 문화를 체험하고 싶었는데 다른 나라들보다 직장과 생활 여건이 더 낫다는 생각에 국내에 터를 잡았다.

그는 긴 수업 시간과 많은 공부량에 허덕이는 학생들을 보면 안쓰럽다고 했다. "다른 나라 학생들이 이곳 학교에 다닌다면 견디기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오후 8, 9시까지 수업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연민이 느껴져요. 자칫 배우려는 열정이 식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대구에서 4년 넘게 생활한 캐나다인 패트릭 엘리어트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가 생각하는 교육은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능력 등을 고르게 갖춰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 하지만 국내에선 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리산을 여행하다 산 정상에서 고교생 한 무리를 만난 적이 있어요. 몇몇은 최악의 경험이라고 느끼겠지만 재미있고 긍정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어요. 무슨 생각이 들든 직접 체험해볼 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이런 기회가 좀 더 주어져야 한다고 봐요."

미국인 찰스 뮐러 씨는 한국 부모들이 이웃과 비교해가며 자녀에게 비현실적 기준을 들이댄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의 어깨를 지나치게 무겁게 만들어요. 스스로 정한 꿈을 추구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미국 부모들도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긴 하지만 대부분 어떤 직업을 택하라고 자녀에게 강요하진 않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헤더 로스 씨는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학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특히 교육을 잘 받아 뛰어나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부모, 학생에만 해당된다는 것은 좀 불공정하지 않나요?"

물론 외국인 강사 중에는 "높은 교육열 덕분에 한국의 미래가 밝을 것"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다른 나라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교사와 학생 간 관계가 부럽다는 의견이 여럿 나와 눈길을 끌었다. 최근 교권 붕괴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가운데 이 같은 시각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해리슨 씨는 "내가 겪어본 나라들과 달리 이곳에선 대부분 학생들이 교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며 "많은 아이들이 교사와 편안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같아 보기 좋다"고 했다.

◆한국 학생들 '입 안 연다'

외국인 강사들은 국내 학생들이 알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고학년일수록 '내가 한 말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왜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는지, 영어 학원에서 무엇을 배워 갈 것인지 느끼지 못해 수업 참여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부모에 등 떠밀려 목적의식 없이 학원을 찾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미국인 강사 찰스 뮐러 씨는 수업 중 질문을 받은 학생들이 "다른 사람을 먼저 시켜달라"고 할 때마다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암기 위주의 수업 탓이 아닐까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경험이 적은 거죠. 한국 학생들이 다른 나라 학생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진 몰라도 에세이로 쓰거나 말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미국인 제이미 모이어 씨는 암기에 너무 치중하는 학습 방식을 지적했다. "책이나 교사를 통해 얻은 지식만 간단히 말하는 것은 영어 실력을 늘리는 데 그리 도움이 안 돼요. 매끄러운 발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법이죠. 그래야 영어가 빨리 늡니다." 특히 최근 영어 활용의 주안점이 정확성보다는 유창성에 맞춰진 만큼, 회화 수업에 참가할 때도 '정확한 문법에 맞는 영어'보다는 자신의 생각(내용)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훈련이 더 요구되고 있다고 했다.

발음이나 어휘 등에 치우친 영어 실력도 문제지만, 수업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더 문제라는 의견도 있었다. 학교 수업과 여러 학원을 전전하다 보니 학생들이 지칠 수밖에 없다는 것. 외국인 강사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똑똑한 아이인데 수업 때는 좀처럼 그 같은 영특함이 빛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며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숨을 돌릴 여유도 줘야 한다. 학부모들이 학원 시간표를 빠듯하게 짜면 실력도 올라갈 것이라고 무턱대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방인의 삶, 긍정적인 사고라면 OK

현재 대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강사는 약 870여 명. 18일 대구시외국어교육협의회 주최 '2011년 외국인 강사 연수'에는 350여 명이 참석했다. 3시간가량 진행된 연수에는 태권도 시범과 전통춤 공연 등 문화 행사가 외국인 강사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우리의 위협'이라며 영어 강의를 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동영상에선 외국인 강사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

연수에 참석한 외국인 강사들 대부분은 미국, 호주, 영국 등 서양권 국가 출신. 좀처럼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원과 집만 오간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한국 생활이 즐겁다는 경우도 많았다.

패트릭 엘리어트 씨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터키, 필리핀,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과 일본 등 해외 거주 경험이 풍부하다. 그 속에서 외국 생활에 대한 노하우가 쌓였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팔공산, 특히 산 속 사찰들을 찾아보라고 권했다.

외국인 강사들이 여가 시간 주로 모이는 장소로 꼽는 곳은 중구 동성로 등 도심. 서로 다른 국적, 경험, 나이에도 이국 생활의 애환을 나누며 쉽게 어울린다. 좀 더 적극적인 이들은 외국인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도 스스럼없이 찾아다닌다. 대부분 좋아하는 음식으로 갈비, 비빔밥, 김밥 등을 꼽았으나 싼 가격과 다양한 메뉴, 푸짐한 인심을 들어 기사식당 예찬론을 펴는 이가 있을 정도다.

행사를 주최한 대구시외국어교육협의회 정창준 회장은 "한국 문화를 알리고 낯선 생활에 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이 행사를 열었다"며 "내년부터는 연수 참석을 의무화해 외국인 강사의 질을 더 높이는 데 신경 쓸 것"이라고 밝혔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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