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지방재판의 즐거움

입력 2011-06-21 07:58:05

옥천IC에서 내려 좁은 국도를 몇 굽이 돌면 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있다. 나지막한 토담 너머로 정지문을 열면 금방이라도 하얀 수건을 두른 어머니가 나오실 것 같이 정겨운 곳이다. 나는 대전 재판을 다녀오는 길에 가끔 이곳에 들른다. 일에 지치고 심경이 복잡할 때,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 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타 지역의 재판을 다니자면 어려운 점이 많다. 대개 재판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고, 진행과정에서 의외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어서, 어떤 사건은 10여 회 이상 또는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변호사는 힘들어진다. 재판 진행 중에 수임료를 더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패소라도 하는 경우는 그야말로 낭패다. 이런저런 이유로 원정재판은 시간을 먹고사는 변호사로서는 분명 손실이 크다.

그러나 내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마치 여행을 떠나듯이 원정 재판 길을 나선다. 좋은 음악이 영화의 감동을 살리듯 USB에 잔뜩 담아 놓은 음악은 장거리 운전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찾아본다. 어렵사리 찾아간 식당에서 안주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명함도 건넨다. 변호사인 줄 알게 되면 자기 사연을 들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다가 정말로 사건을 수임하기도 하니 맛난 음식도 챙겨 먹고, 일도 한 셈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길이 지루하면 일부러 산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어느 해 겨울, 의성 부근을 지나다가 허기감에 휴게소에 들렀다. 허겁지겁 어묵과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며 연탄난로에 몸을 녹였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주인아주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고, 그 남편의 보험금 청구사건을 맡기도 하였다. 얼마 전 설움에 창백했던 그분의 얼굴이 떠올라 휴게소를 들렀지만 그 부인은 연락이 두절되었다. 산다는 것이 하염없이 고달프지만, 지난 일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것일까.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국도 가에 파는 지역 특산물을 사기 위해 차를 멈추기도 한다. 영덕을 지나 청송을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털복숭아를 사기도 하고, 7번 국도에서 송이버섯을 산다. 안동의 사과, 상주 포도, 청마문학관이 있는 통영 가는 길에는 간간한 맛이 제격인 젓갈을 넉넉하게 사온다.

지방 재판이 힘들고 경제적 손실도 감수해야 하기에 이제는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이런 여행의 묘미 때문에 뿌리치지 못한다. 낯선 국도에서 날이 저물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삶으로 돌아갈 설렘을 맛보기도 하고, 나의 일상이 더욱 소중함을 느끼기도 한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7월에는 '청포도' 시인, 육사 시비(詩碑)가 있는 포항 호미곶에 갈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석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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