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25)대구역과 일제 강제징집

입력 2011-06-18 08:00:00

"아들아 내 아들아!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죽었느냐"

그림:김영대 화백
그림:김영대 화백
일제강점기 대구역 광장
일제강점기 대구역 광장

성전완수(聖戰完遂), 황군만세(皇軍萬歲), 기무운장구(祈武運長久), 축황군대승리(祝皇軍大勝利).

대구 북성로에서 제일 큰 곡물상회인 안상기의 집에서 그의 둘째 아들 안영수의 환송회가 열리고 있었다. 벽면마다 붓글씨로 쓴 큼직한 글씨들이 현란했다. 대문에는 구국출정의병의 집(救國出征義兵の家)이라는 깃발이 내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안상기의 둘째 아들 안모토 히로시게의 친구들과 미나카이 백화점(대구 북성로의 본점에서 출발, 조선과 만주, 일본 등에 18개 점포를 가지고 있었던 대형 백화점) 동료 점원들이 잇따라 건배를 외쳤다. 이쪽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건배를 제의하면, 저쪽에서 성전완수를 외치며 화답했다.

안모토 히로시게는 아버지 안상기를 따라 일찌감치 창씨개명했고,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미나카이 백화점 판매부에서 일했다.

이웃의 주민들과 히로시게의 백화점 동료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성 점원들도 군데군데 끼어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자리의 좌장이라고 해도 좋을 하야시 다케모도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야시는 미나카이 백화점 4층 이불매장 주임으로 안모토 히로시게의 직속상관이었다.

"안모토 히로시게 상 반자이!"

"반자이!"

하야시의 선창에 따라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제창하며, 두 손을 쳐들었다. 그 소리가 방 밖으로 울려 퍼져 마당에서 자리를 깔고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만세를 외쳤다. 불을 피워놓았지만 아직 겨울 끄트머리라 날씨는 차가웠다. 그러나 마당 안은 출정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추운 줄을 몰랐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반자이!"

"다이니뽄 데이고꾸 반자이!(대일본 제국 만세!)"

"반자이!"

취기가 오르자 방에서 군가가 시작됐고, 마당에서도 힘차게 따라 불렀다. 사람들의 표정은 결연했고, 목에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군대에 다녀온 예비역 출신의 일본인들도 서너 명 끼어 있었으나 군대 근처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군가 한두 개쯤은 알고 있었다.

'피었다면 지는 것은 각오한 것/ 멋지게 지자 나라를 위해/ 너와 나는 동기인 벚꽃/ 같은 병 학교 뜰에 피는/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닌가/ 꽃이 만발한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봄의 가지 끝에 피어서 만나자.'

태평양 행진가였다. 아메리카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총동원령 같은 징집은 없었을 것이다.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시작한 전쟁이었다. 시작했다면 죽을 때까지 치러야 한다. 방과 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에 취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조선인 안모토 히로시게가 출정하던 날 그의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이 대구역 앞 광장으로 몰려나와 배웅했다. 북성로의 점포 주인들과 아내들이 종이로 만든 일장기를 흔들며 안모토 히로시게의 무운을 빌었다. 조선인의 일에 무관심했던 일본인 부녀들도 이날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학생들은 제각각 축 입영, 충군애국, 멸사봉공 따위의 글을 쓴 일장기를 안모토 히로시게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일장기가 그려진 종이를 길게 메고 있는 안모토 히로시게는 순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으로 간다는 사실에 긴장했지만 배웅 나온 사람들의 환호에 자못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환호하는 어린 여학생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 답례를 하기도 했다.

히로시게는 집안과 동네 어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버지 안상기와 어머니 앞에 이르자 땅바닥에 손을 짚고 큰절을 올렸다. 그는 친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포옹했으며, 시종 억지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내 김영숙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마. 살아서 올 거야. 아버지가 따로 손을 써놨기 때문에 북지나 남방 전선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

"몸조심해요. 식사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요."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거야."

아내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안모토 히로시게는 입영자들의 대열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씩씩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자 몇몇이 출정가를 불렀고, 노래는 이내 합창이 되어 대구역 광장을 메웠다.

'하늘을 대신해서 불의를 토벌하자/ 충용 무쌍의 우리 군대를/ 환호의 한목소리로 보낸다/ 이제 출진하는 부모의 나라에/ 반드시 승리를 가지고 돌아오리라/ 용감한 병사의 마음.'

"안모토 히로시게 상 반자이!"

"다이니뽄 데이고꾸 반자이!"

열렬한 환호 속에서 열차가 출발하자, 안모토 히로시게의 아내 김영숙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처절하게 울었지만 출정가와 만세의 외침 속에 묻혔다.

대구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들의 응원 속에 센닌바리(千人針)을 두르고 떠났던 안모토 히로시게는 아홉 달 뒤인 그해 십이월 유골로 돌아왔다. 그가 속한 중대가 만주리 동남쪽 산림지대에서 비적토벌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고 했다. 며칠 전 안모토 히로시게가 전사했다는 우편통지서가 왔을 때 그의 아내 김영숙은 멀건 눈을 끔뻑거렸을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며칠 뒤 남편의 유해가 기차 편으로 돌아온다는 전보가 도착하자 그녀는 비로소 젖은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기차가 대구역에 멈추었고, 일본 육군 조장(曹長:옛 일본군의 하사관급 최고 계급으로 현재 한국군의 상사에 해당한다) 계급장을 단 다소 뚱뚱한 남자가 유해를 담은 상자를 들고 내렸다. 대구부 재향군인회 회장과 예비역 군인들, 또 그들의 아내들, 그리고 안모토 히로시게의 아버지 안상기와 그의 형 안영호가 마중 나왔다. 키가 크고 얼굴이 멀건 안영호가 흰 보자기로 싸인 동생의 유골을 받았다. 보자기에는 '고(故) 육군 상병 안모토 히로시게 상'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조선인으로 태어났던 안영수는 죽어서 진정한 일본인 안모토 히로시게가 됐다. 일병이었던 그는 작전 중에 죽어서 상병으로 추서됐다.

유골 행렬이 북성로로 들어왔을 때 마중 나온 일본인들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안모토 히로시게가 본래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순간만은 그를 완전한 일본인으로 여겼고, 그가 마땅히 일본 장병들이 묻힌 신사에 합사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상병 안모토 히로시게의 유골을 갖고 온 사람은 그의 상관 야나기 조장이었다. 야나기 조장은 유족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가 죽던 상황을 전했다.

"우리는 조선인 비적 부락을 토벌하던 중이었습니다. 산속 토벌은 위험한 작전이었기에 우리는 주로 마을 수비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비적들이 동청철도와 마을을 습격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농부들이 낮에 밭에서 일을 하다가 비적의 총에 맞아 죽거나 잡혀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연대에서는 비적들의 근거지를 토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적들의 근거지는 침엽수가 울창한 산속 마을이었습니다. 놈들은 나무와 구릉들 사이로 간간이 집을 지었는데, 워낙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마을이라 일거에 소탕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놈들은 우리가 산속 근거지를 습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초기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집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랫집을 공격하면 위쪽에서 이쪽이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안모토 히로시게 상병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비적들의 집들을 차례로 공략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숨어서 총을 갈기는 비적의 흉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토벌 작전을 끝낸 뒤 우리는 안모토 히로시게 상병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안모토 히로시게 상병은 천황폐하의 용감한 군인으로 죽었습니다."

야나기 조장이 안모토 히로시게 상병의 장렬한 전사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안모토 히로시게의 아내 김영숙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들을 잃은 여자가 남편을 잃은 여자의 두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조선인 안모토 히로시게는 일본군인의 신분으로 조선인 비적들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곧 장례식이 열렸고 안상기가 미리 모셔온 스님은 죽은 자가 극락세계에 태어나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자옵기를 축원했다.

'원왕생 원왕생 원생극락견미타 획몽마정수기별 (…) 원왕생 원왕생 원생화장연화계 자타일시성불도.'

스님이 망자의 왕생을 축원하는 동안 안모토 히로시게의 늙은 어머니는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아들의 영혼을 달랬다.

"불로불사 어데 두고, 적막공산은 꿈길인 양 말없으니, 무상할 손 인생이여 존비귀천 따로 없다. 살아생전 영웅호걸 죽어지니 영가로다. 천당극락 좋다 하여 영과 육이 나뉘어져, 가는 길이 있다 한들, 남은 식솔 남겨놓고 미련 없이 떠날 자가 몇이런가. 속고 속아 살은 인생, 이 세상이 더럽기로 내 집 식구 사는 세상 춤을 뱉고 떠날손가. 살아생전 못다 한 일, 누가 있어 하여 주며, 원수 맺고 빚진 사람, 누가 있어 갚아주랴."

울음 섞인 어미의 목소리는 슬픔을 넘어 음산하기까지 했다. 귀신이 된 아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다면, 그 역시 울음을 견뎌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슬프다 이내 인생, 천지간에 무상공도 뉘라서 아니 가리. 아들아 내 아들아, 어느 곳에 머무는고, 늙은 에미를 여게 던져놓고 너는 어데로 간단 말가. 내 아들아, 너는 어데로 간다는 말가."

스님의 축원과 부처님의 가피에 힘입어 먼 길을 떠나려던 아들은 어미의 울음소리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망자의 어미가 울자, 망자의 처가 울었고,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들이냐! 그렇게 울어대서야 그놈이 어찌 먼 길을 떠나겠느냐'고 고함을 질러대던 아버지 안상기 역시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 아비를 묻어야 할 놈이 제 멋대로 죽어서, 아비에게 저를 묻어달라고 했다.

"나쁜 자식!"

조선인으로 태어났던 안영수는 안모토 히로시게가 되어 죽었고, 전장에서 죽은 일본인이 묻히는 충령탑 묘지(지금의 남구 영선시장 인근)에 묻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젊은 처가 충령탑 앞에 서서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묘지까지 동행했던 일본인들이 함께 고개를 숙였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는 조선인을 지원병제 혹은 징병제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1945년 패전 당시 전장에 있던 조선인 군인, 군속만 36만여 명이며, 이 중 16만 명만 귀환했다. 나머지는 생사를 모르며, 1945년 이전 징집자나 지원자에 대한 통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조두진기자 @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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