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이 좋은 계절 5월이다. 넓은 들판에서 일렁이는 맥파(麥波)를 보며 푸른 봄을 생각해 본다. 보릿고개의 그늘진 추억이 생각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춘궁기의 애환을 알 리가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어 그 시대를 살아온 필자 역시 당시의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농촌에서 보리수확을 앞둔 3, 4월을 보릿고개라 불렀다. 지난해 피땀 흘려 추수한 쌀 양식은 이듬해 3월이면 바닥이 났다. 게다가 4월 학기(현재는 3월 학기) 초가 되면 대학에 입학한 자녀의 등록금, 중'고등학교의 기성회비 때문에 부모들은 애간장을 태우다 못해 등골이 빠졌다고 표현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학자금 걱정은 엎친 데 덮친 격이어서 여간 어려웠던 게 아니다. 소 팔고 논 팔아 자식 가르치던 1950, 60년대 농민들이 애타는 심정을 뭉뚱그려 보릿고개라 표현했다.
이렇게 공부한 사람들은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고 신문은 3월이 되면 어김없이 보릿고개의 아픈 이야기를 사회면 톱기사로 올렸다. 얼마 안 있으면 모내기철이다. 단오 전후 며칠이 모내기 적기였지만 요즘 농사짓는 방법이 달라져서 모내기철이 사뭇 앞당겨졌다. 5월 초순부터 모내기는 시작될 것이다.
옛날에는 권농일(勸農日)이란 게 있어서 농사를 독려했다. 시골의 초'중'고교에서는 모내기와 추수에 맞춰 하루 이틀 농번기 방학도 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함석헌 선생이 '사상계'에 농사 이야기를 기고한 일이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옛날에 한 농부가 추수를 앞두고 논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 논의 벼 이삭은 다 찼는데 자기 논의 벼는 아직 영글지 않아 속이 몹시 상했다. 속이 상한 농부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자기 논의 벼 모개미를 모두 잡아 빼 다른 사람 논의 벼처럼 해놓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우리 집 벼가 남의 집 벼보다 훨씬 크다고 자랑했다. 며칠 후 벼가 얼마나 잘 자랐는가 보려고 논에 나간 아내가 하얗게 타 죽은 벼 이삭을 보고 대경실색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결과 위주의 빨리빨리병(病)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바보 같은 농부라도 오늘 씨를 뿌리고 내일 밭에 나가 싹이 잘 났는지 허적거려 보는 일은 없다. 적어도 씨를 뿌린 후 사흘은 차분하게 기다리는 게 농부의 마음이다. 또 수확한 곡식을 얼마간 묵혀 두었다가 먹거나 씨앗으로 삼는 지혜도 가지고 있다.
곡식이든 과일이든 일정한 후숙기(後熟期)를 거쳐야 제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법이다.
영농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농사짓는 비결은 근면 성실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항상 근면하고 성실하다. 이런 이유로 농심을 천심이라고 한다. 또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무엇인가. 인내 아닌가. 농사도 사람 사는 이치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교육처럼 과정이 중요하다.
씨 뿌려 바로 열매 맺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늘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일정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과는 없는 법이다.
모내기를 한 뒤 김매고, 거름 주고, 병충해도 예방해야 추수를 할 수 있다. 과정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래서 인내와 기다림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농사에도 속성재배가 있다 하지만 속성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속성에는 무언가 모자람이 따르게 마련이다
근면 성실은 농부의 생활신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직 지성이라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정부는 농심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화창한 날을 맞아 사무실 앞의 넓은 들녘을 보니 이런 와중에도 농민들은 또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저 가슴이 아프다. 농민이 잘사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신종운(삼백레미콘㈜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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