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새 술은 새 부대에…

입력 2011-06-15 11:05:28

1996년 3월 13일 대구 프린스호텔 객실에서 정모(23'여) 씨가 잔인하게 살해됐다. 경찰은 호텔 CCTV를 통해 이날 출입자를 확인한 뒤 미 전(前) 제19지원사령부 소속 그레고리 크리스토퍼 데니(21) 일병을 유력한 용의자로 꼽았다. 대구 남부경찰서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을 살펴보며 미군 범죄 수사에 나섰다. 그레고리 일병은 사건 발생 1주일 뒤 전역했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경찰은 미군으로부터 아무런 협조를 받지 못한 채 수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그레고리 전 일병은 이제 피의자나 용의자 신분도 아닌 30대 중반의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자녀와 함께 잘 살고 있을 터이다.

2011년 5월 22일 경상북도는 칠곡군 왜관읍 미군기지 주변 3개 지역에서 지하수 시료를 채취했다. 1970년대와 80년대 왜관 캠프 캐럴에 근무했던 중장비 기사 등이 '에이전트 오렌지'(맹독성 혼합 제초제:고엽제) 드럼통 600여 개를 기지 안에 파묻었다는 증언을 한 뒤였다. 경북도는 다이옥신 검출 여부를 지역의 한 대학에 의뢰했고 4, 5일 뒤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경북도는 이후 다이옥신 검출 결과가 나왔지만, 결국 공식 발표를 하지 못했다. '언론에 공개되는 모든 정보는 보도 자료를 배포하기 전 한미 SOFA 합동위원회 환경분과위원회 양측 공동위원장의 공동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환경정보 공유 및 접근 절차'(2002년 1월 발효)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다수 주(州)에서 살인죄 공소시효가 없지만,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 이전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후 25년)이다. 국민들은 15년 전 대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유력한 미군 용의자에 대해 이제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환경오염과 관련된 '우리 땅에 대한 우리 조사'에 대한 결과조차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1966년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에 근거해 합의한 SOFA는 '평등 조약'을 지향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그동안 2차례에 걸쳐 SOFA를 개정(합의의사록, 환경양해각서)한 데 이어 3개의 부속 합의서를 마련하면서 '불평등 조약'을 꾸준히 보완해왔다.

'환경양해각서에 따른 정보 공유 및 접근 절차' '미군 반환'공여지 환경조사와 오염 치유 협의를 위한 절차 합의서(이하 정보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 A)' '공동 환경평가 절차서' 등 3개의 부속 합의서는 보다 진전된 내용이다.

하지만, SOFA가 평등 조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

'주한 미군의 구성원'군속 및 그들의 가족이 한국 내에서 죄를 범한 경우 미국법령에 의해 처벌할 수 있으나 한국법령에 의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미군의 안전에 관한 범죄 포함)일 때는 미국이 전속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재판권을 행사할 권리가 경합할 경우 미국의 재산이나 안전에 대한 범죄와 미국 군대'군속 및 그 가족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범죄, 공무 집행 중 작위 또는 부작위에 의한 범죄에 대해서는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가진다.'(SOFA 제22조)

'미합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 시설과 구역을 반환할 때 이들 시설과 구역이 합중국 군대에 제공되었던 당시의 상태로 원상회복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으며, 이러한 원상회복 대신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보상해야 할 의무도 지지 않는다.'(SOFA 제4조 시설과 구역-시설의 반환)

'환경오염의 치유 수준 및 방법, 사후 관리 방안 등에 대해서는 SOFA 합동위원회 환경분과위원회에서 추후 협의하되, 환경오염 치유에 따른 비용은 반환지 시설의 경우 미국이, 공여지 시설의 경우 한국이 각각 부담한다.'(정보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 A)

'인간 건강에 대한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환경오염에 대해서만 정화'치유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다. 기본적인 정화'치유 비용은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공동 환경평가 절차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은 한국전쟁 직후와 SOFA를 비준한 1960년대 상황과 21세기 오늘은 시대적 상황과 여건이 크게 바뀌었다.

지역 법대 한 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소파는 편안해야 앉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데, 불편하니 소파가 필요없는 자리를 만들든지 아니면 당연히 다른 소파로 바꿔야 되지 않겠느냐"고 빗대 말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김병구(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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