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느림에 대하여

입력 2011-06-13 07:23:45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걷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곤 했었는데 이렇게 한가로이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섬마을은 '물섬마을'이라고도 한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수도리(水島里)이다. 전통가옥과 수려한 산을 끼고 낙동강의 지류인 영주천과 예천의 내성천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아름답기로는 매화낙지(梅花落地),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고 해서 길지로 손꼽힌다. 1666년 반남박씨(潘南朴氏)가 이곳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들어와 터를 닦고 집을 지었는데 이후 예안김씨(禮安金氏)가 들어오면서 두 성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됐다. 모두 5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집들은 전통가옥이 40여 동이고, 100년이 넘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 16채나 있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책을 읽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90세 넘는 노인 중에도 대학을 나온 사람이 있고, 무섬이 배출한 현직 대학교수가 16명이나 된다고 안내자는 자랑이다.

석양이 물들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좀 더 걷기로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큰집에 눈에 들어오는데, 해우당(海愚堂)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예안김씨 김낙풍이 지은 것인데 현판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처가가 있는 무섬에 잠시 기거하던 시인 조지훈이 별리(別離)라는 시에서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처럼'이라고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한가로이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는 것이 피에르 쌍소의 주장이다. 느림은 시간의 결을 만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급하게 다루지 않고, 그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는 것이며 살아가는 동안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사실 한가롭게 걷기는 그 어떤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걷는 그 자체만으로 자유를 느끼면서 어떤 사물에도 의미를 찾으려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여유로움이 아닐까. 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이 없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지난달 16일 타디그레이드라는 벌레가 우주왕복선 인데버호를 타고 우주로 갔다. 이 느림보 동물은 절대영도(영하 273℃)와 끓는 물 온도보다 높은 151도에서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생물에게 치명적인 농도의 방사성 물질 1천 배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물과 산소도 없는 진공상태의 우주공간에서 열흘간이나 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다 자란 성체의 크기가 1.5㎜밖에 되지 않는 이 벌레가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존하며 번식도 해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5억3천만 년 전에 출현한 이 타디그레이드의 놀라운 생명력을 그 느림에서 보는 생물학자들도 있다 하니 우리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강 문 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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