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일어난 날, 전속력으로 질주를 계속해 온 일본이 멈췄다. 분초를 다투는 세계적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일본은 서서히 역주행을 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 대지진은 사람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공포와 슬픔이 지난 후, 상대의 작은 친절에도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슈퍼나 백화점에서 점원과 나누는 대화가 늘어나고, 같은 아파트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두꺼운 벽 너머에 있는 타인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서로 돕는 것이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는 '모모'라는 아동 문학을 남겼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작품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이기도 하다. 주인공 모모는 가만히 말없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상대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되찾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소녀이다. 그런 모모 앞에 어느 날 시간 도둑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시간을 절약하도록 해서 남는 시간을 모두 독차지하려 한다. 이 이야기는 시간에 쫓겨 마음의 여유를 잃은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바쁜 삶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진 때 많은 유학생이 귀국 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망가져버린 연구실을 옮기는 날 18명의 유학생 가운데 단 2명만이 얼굴을 내밀었다. 신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엄청난 잡일에 쫓겼다. 대학원생들의 컴퓨터를 설치하고, 학생 명단 및 수업 계획서 작성 등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일을 했다. 어느 날 새로 들여놓은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문득 얼굴을 들어 보니 다른 대학원생들이 컴퓨터를 보면서 공부를 하거나 잡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학생이 나에게 "열심히 해봐야 교수님한테서 돌아오는 대가가 없으니 적당히 하세요"라고 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대가'와 같은 말을 몰랐다. 영악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 우리는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훨씬 더 순수하게 살 수 있었다. 성장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시간과 노력의 효율성만을 따지고 살면, 그것과 함께 인간미도 사라져 버린다.
몇 년 전, 사회인이 되고 나서 처음 중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한 친구가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으며, 곧 결혼도 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했다. 내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녀는 내 치마에 음료수를 쏟았다. 그리고 "어머, 실수했네"라며 그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같은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싸운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작은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른다. 축축이 젖은 치마의 찬 기운이 당시 내가 그녀의 마음에 남긴 상처처럼 다가왔다. 사람에게 상처를 준 과거도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과거도 원래처럼 되돌릴 수 없다. 그녀가 살아온 긴 시간도 그녀 자신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한번 스쳐 지나간 사람, 또 잊혀가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일생에 한번'(一期一會)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원래는 다도(茶道)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대와 함께 지금과 똑같은 차모임은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 그 순간 상대를 성심성의껏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여유가 없어지고, 주위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어딘가 소중한 무엇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기 위해 가끔은 스스로 속도를 늦추고 멈춰야 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지, 시간에 흘러가서는 안 된다. 먼저 오늘 맛있는 차를 한잔 마시자. 그리고 누군가와 편안한 대화를 해보자. 목적지를 향해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을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요코야마 유카(도호쿠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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