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검정고시가 도입된 시기는 광복 직후다. 당시 독학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대학 진학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문교부가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현 고졸검정고시)를 실시한 것이 효시다. 그동안 검정고시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었다. 가난의 굴레를 벗기 힘들었던 1950~70년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게 학업은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많은 우리 부모님들이 먹고 살기 바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뒤 미뤄 두었던 학업을 시작하면서 검정고시는 만학도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됐다.
하지만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검정고시 문화도 많이 변했다. 이제 검정고시는 10대 인재들의 등용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검정고시가 결혼이주여성들과 북한 이주민들의 한국 정착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검정고시 문화와 위상을 들여다 봤다.
◆10대 인재들 약진 돋보여
박선우(14'대구 남구 대명동) 군은 올 4월 치러진 고졸검정고시 시험에서 대구 최연소 합격자에 이름을 올렸다. 정상적인 교육 코스를 밟는 학생보다 학업 기간을 5년 앞당긴 셈이다. 더구나 박 군은 지난해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6개월 만에 고입검정고시를 통과한데 이어 다시 6개월 만에 고졸검정고시에도 합격하는 놀라운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 박 군의 누나 박상아(16) 양도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박 양은 2009년 8월 고입, 2010년 4월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들 남매가 검정고시를 준비한 것은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여의치 않아 학교 진학 대신 검정고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 박 양이 먼저 길을 터자 동생이 뒤따라 왔다. 박 군은 누나가 보던 교재를 물려 받아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 간격으로 남매는 나란히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아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박 양은 수능 준비를 착실히 해서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할 계획이다. 장래 희망이 과학자인 박 군은 "남들보다 일찍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덕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 당분간 책을 읽으며 사고의 폭을 넓힌 뒤 천천히 수능 준비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만학도들이 주를 이루었다. 10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말썽을 일으켜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소위 말하는 문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0대 우수 학생들이 검정고시로 몰리고 있다. 내신을 위해 학교를 자퇴했거나 학업성취도가 빨라 조기에 학업 과정을 마치려는 10대들,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학파들이 검정고시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서예진(14'대구 달서구 신당동) 양은 올 4월 치러진 고입검정고시에서 전 과목 만점으로 전국 수석을 차지했다.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서정남 교수의 딸인 서 양은 초등학교 4학년인 2007년 유학을 떠나 호주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귀국 후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틀에 박힌 학교생활보다 여유를 가지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자퇴를 한 뒤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서 양은 "검정고시의 장점은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책도 읽고 음악 감상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어 좋았다. 토익시험 준비하며 잠시 숨을 돌린 뒤 고졸검정고시를 준비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양검정고시학원 김혜은 성서점 원장은 "검정고시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10대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앞으로 만학도들의 비중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학업성취도 측면에서 만학도들을 크게 앞지르고 있는 10대들에게 맞춤식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전문반을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 통합의 매개체
모로코 출신의 하야트(25'여'대구 동구 효목동) 씨는 대구남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중입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는 "올 3월 친구 소개로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에 등록하면서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 중입검정고시에 합격하면 고입검정고시에도 도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구남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지난해 5월부터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무료 중입'고입검정고시반을 운영하고 있다. 검정고시반은 자녀 교육에 필요한 기초 학력을 높이고 취업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설됐다. 수업은 중입의 경우 월'수요일 오전 10~11시30분, 고입은 월'수요일 오후 2시~3시30분 남구사회복지관 5층에서 진행된다. 학습지도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입시학원 선생님들이 맡고 있다.
현재 중국'베트남'필리핀'모로코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20명의 결혼이주여성들이 중입과 고입검정고시반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과목은 국어와 사회다. 수학'과학과 달리 국어와 사회는 완전히 새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어도 능숙하지 않고 가사일을 하는 틈틈이 공부를 해야 하는 까닭에 학업성취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렇다 보니 중도에 그만 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공부를 그만 둔 사람이나 공부를 계속 하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공부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 중도 탈락자들 가운데 다시 등록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대구남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검정고시반은 아직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강생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비록 가시적인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려는 수강생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김태화(47'여) 대구남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은 "결혼이주여성을 고용하려는 사업장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검정고시반을 개설하게 됐다. 합격증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한국 사회의 소속감을 키워가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공부하기를 원하는 결혼이주여성은 누구나 신청(053-475-2324)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주민들도 검정고시를 통해 남한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경북대에 재학 중인 박모(28'여) 씨는 2008년 북한을 탈출 한 뒤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그녀는 지난해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올해 특별전형으로 경북대에 진학했다. 김모(24) 씨와 서모(20) 씨는 현재 검정고시학원에서 고졸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대학을 졸업한 뒤 남부럽지 않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김모(21'여) 씨는 13세이던 2003년 동생(당시 11세)과 함께 탈북해 남한으로 왔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009년 숭실대에 입학한 그녀는 북한이주민들로 구성된 봉사단체를 만들어 북한이주민들의 남한 정착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검정고시를 통해 사회 복귀를 꿈꾸는 이들도 있다. 대구시 달서구 두류동에 있는 미혼모시설인 홀트아동복지회 사랑뜰. 이곳에서 박모(18) 양과 신모(17) 양은 고졸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이들이 새출발을 위해 선택한 길이다. 홀트아동복지회 사랑뜰은 미혼모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07년부터 검정고시반을 운영하고 있다. 수업은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선생님들이 1대1 과외식으로 진행한다. 맞춤식 교육 덕분에 합격률은 높은 편이다. 올 4월에는 이모(18) 양이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숨은 명문 '전검동'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동문회는 어디일까. 바로 검정고시 동문회다.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 사무국은 검정고시 출신 동문들이 1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 18개를 비롯해 전국 16개 시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 약칭 '전검동'으로 불리는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는 1973년 만들어진 전국대학검정고시연합동문회(전검련)를 모태로 1989년 창립됐다. 동문 숫자가 워낙 많고 찾아갈 모교도 없어 결속력이 약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동질감이 이들을 하나로 묶고 있다.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는 매년 송년의 밤과 체육대회를 통해 단합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4일 서울 남산자유센터 웨딩홀에서 '정기총회 및 송년의 밤' 행사를 가진데 이어 지난달 14일에는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체육대회를 열어 화합을 다졌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검정고시 동문은 명사들도 많이 배출했다. 법조계 인사로는 김석휘 전 법무부장관, 김두희 전 법무부 장관, 이근웅 전 사법연수원장,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 등이 눈에 띈다. 학계에서는 정근모 전 명지대 총장, 이성근 전 한성대 총장 등이 검정고시 동문으로 꼽힌다. 정계 인사로는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상희 전 과기처 장관,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 최병국 경산시장 등이 있다.
연예계에도 검정고시 출신이 많다. EBS 어린이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의 '뚝딱이 아빠'로 유명한 개그맨 김종석, 방송인 정재환, 피아니스트 진보라, 가수 보아'김장훈'김창렬 등이 검정고시 동문이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소설가 이문열, 소설가 겸 번역작가인 이윤기, 시인 이승하'황학주, 문학평론가 김지룡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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