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소리에 대한 단상(斷想)

입력 2011-06-08 07:10:56

거의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나는 소리에 대해 매우 민감한 편이다. 특히 몇 번의 안과 수술로 '보는 것'을 금지당한 채 어두운 방안에서 일정 기간 동안 음악만 들었던 이후로 더욱 그러하다. 가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데, 과학적인 증명은 찾아보지 않았지만 사람의 목소리에도 지문 같은 개인적 특성이 있을 것이고, 그 소리의 파장을 그런 필요나 단련에 의해 내가 잘 알아듣는 쪽이 되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햇살이나 전깃불 같은 인공적인 빛에도 차단당해야 했던 그 '암울했던 시절'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음악들은 애잔하도록 아름다웠다. 지금도 혹시 지겨워질까봐 아껴 듣는 드뷔시와 퀸과 코엔은 그때의 내겐 새로운 '가지 않은 길'이었다. 데미스 루소스는 '환자복에 갇힌 비루함'이라 당시를 자책하던 내게 법열(法悅)의 푸른 옷소매를 언뜻 보여주기까지 했다.

라디오 국악프로그램은 소리로도 나를 이끌었다. 그때 들은 춘향가를 최근 다시 한 번 완창으로 들었는데 역시 절절했다. 내쳐 심청가 중 '부친과 이별하는 장면'과 적벽가의 '우는 군사들의 노래'도 추임새 넣어 들으며 한창 판소리 이론을 공부할 때 들은 아니리, 더늠, 바디의 뜻을 다시 더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는 끝내주는 말처럼 질병이 음악 듣기의 세계로 나를 이끈 셈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과 소리를 좋아하는 만큼 반대급부로 듣기 싫고 영 적응이 안 되는 소리들도 있다. 특히 주택에서 고층 아파트로 이사와 베란다 창을 뜨르르 울리는 차 지나는 소리와 비명 같은 경적, 층간소음에 부동산업자에게 속은 거라 몇 달 이를 갈았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의 소음은 자장가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내 집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니, 쯔쯔, 적응의 동물 범주에서 나도 그리 자유롭진 못한 터수다. 그렇지만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소리들이 참 많다.

칠판에 분필 끌리는 소리, 더빙된 영화의 과장된 여자 울음소리, 커다란 목소리를 가진 이의 탁한 웃음소리, 급브레이크 소리, 끝까지 견디며 들어야 하는 연습 부족의 연주 소리, 담백하지 않은 시 낭송… 열거하자니 끝이 없을 듯하고, 그러다가 문득 등이 서늘해진다. 나 또한 고분고분하지 않고 직설과 독설을 자주 내뱉는 성격인지라 필경 나의 소리로 인해(문자와 침묵도 포함하여) 상처받은 이들이 있을 터. 아, 이 일을 어쩌나.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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