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고엽제 파묻기와 양심 파묻기

입력 2011-06-06 10:58:35

김정길
김정길

고엽제.

월남전 때 정글의 나뭇잎을 말려 베트콩의 게릴라전을 막아보려고 뿌린 독극물이란 건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다. 정글의 찌는 무더위 속에 웃통을 벗은 우리 파월 장병들이 약 이름을 숨긴 채 뿌린 고엽제를 시원하다며 샤워하듯 멋모르고 맞았다는 것도 모두가 다 안다. 그리고 제대 후 원인 모를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2세 자녀에까지 질병이 물려졌다는 이야기 또한 다 안다.

지금까지의 고엽제 이야기는 대충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그 독극물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 땅에 몰래 묻혀 있다는 의혹이 폭로되면서 고엽제 이야기는 다시 불거졌다. 미군부대 앞에서는 시위가 이어지고 언론은 미군의 미적대는 조사 태도를 연일 비판한다. 미군 사령관의 입은 '묻혔다'고 했다가 '파 옮겼다'고 했다가 오락가락한다. 그런 무서운 화학독극물을 그것도 수백 드럼씩 묻고, 옮기고 했다면서 명색이 세계 최고의 군대에 '기록'이 없다고 했다. 의심과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더 피어오른다. 시위가 격해지고 여론의 비판이 점점 세질 수밖에 없다. 비행기로 몰래 뿌려 우방국 젊은 장병들을 고엽제 환자로 만든 것까지는 전쟁 중의 비극이었다 치자. 그러나 해독을 알면서도 땅속에 몰래 되묻어 우방국 국민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두벌 죽임 상황은 40여 년 전처럼 떠도는 '이야기'로 때우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번 고엽제 논란은 땅속의 의혹이다. 한마디로 '파보면 끝날 일'이다. 무슨 꿍꿍이로 뭉그적거리고 기록이 있느니 없느니 말재간으로 피해가며 의혹을 키우는가. 그럴수록 오늘의 고엽제 파묻기는 환경 문제에서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확산된다. 그걸 모르거나 알고도 미적댄다면 어리석거나 오만하거나 둘 중 하나다.

자, 여기까지는 남의 나라를 향한 당연한 주권국가의 요구이고 정의다. 그 다음은 우리가 우리 쪽을 향해 생각해 볼 게 있다. 우리는 몰래 파묻고 감춘 것이 없는가. 우리 사회 곳곳에 넓디넓게 파묻혀 있는 정신적 독극물, 바로 부패와 썩은 양심 이야기다. 미군부대 고엽제 깡통보다 우리를 더 해(害)치고 분노케 하는 금감원, 감사원, 금융위의 부패, 저축은행의 파렴치, 헌병단장의 뇌물, 대학 지성인들의 성폭행, 축구단의 승부 조작….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총체적으로 정신이 썩어 있다. 온 나라 '오만 군데'에 몰래 파묻은 양심과 썩은 마음이 묻혀 있었다. 캐내면 캐낼수록 점점 더 썩은 악취가 심해지고 숨긴 구덩이는 넓어져 간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토록 정신과 양심이 파묻히고 감춰져 망국의 조짐 앞에 서버렸는가. 고엽제 몰래 파묻어 둔 남의 나라 군대를 보고 항변하는 우리 모습이 거꾸로 뭐 묻은 쪽이 겨 묻은 쪽을 나무라는 격이 돼 있다.

일부 호남 출신 범죄 집단이 벌인 저축은행 비리가 과연 그쪽 은행들뿐일까. 몰래 파묻어둔 힘 있는 자, 더 가진 자들의 썩은 양심은 단언컨대 빙산의 일각이다. 파내면 한도 끝도 없이 나올 거란 건 삼척동자 눈에도 뻔히 보인다. 그런 의혹과 불신이 온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고 있는 가운데 국회가 검찰 중수부 해체를 합의했다. 치즈를 훔쳤다고 의심받는 쥐들을 코앞에 두고 고양이의 발톱을 잘라 버리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검찰이 발끈하고 튀어 올랐다. 수사 중단으로 시위를 했다.

미군에겐 빨리 땅 파서 고엽제 깡통이 있는지 없는지 캐내라고 다그치면서 도처에 비리와 양심을 파묻어 놓은 우리는 캐내던 삽마저 뺏어버리고 있다. 물론 중수부라는 서슬 퍼런 이름으로 수사해야만 파묻은 양심을 캐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창 비리와 썩은 양심이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입법권을 빌미로 수사 칼날을 무디게 하는 건 민심과 상황을 도외시한 정치게임이다. 생선가게 고양이가 된 감사기관에서부터 돈 따먹는 스포츠경기장까지 곳곳에 양심을 파묻고 사는 나라에서 고엽제보다 더 해독이 큰 비리와 부패를 덮어두려 한다면 무슨 염치로 남의 나라 고엽제 묻은 걸 욕할 수 있을 것인가? 생선 훔친 고양이와 치즈 먹은 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自問)해 보라. 너도나도 물신(物神) 앞에 양심을 내던지고 있는 지금 이 나라는 제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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