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라이온즈 30년] ⑨어긋난 첫 단추, 만루 홈런과 이선희

입력 2011-06-06 08:59:25

이선희의 투구 모습.
이선희의 투구 모습.

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 프로야구는 만루 홈런으로 동이 터, 만루 홈런으로 저물었다.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이 맞붙은 개막전(3월 27일)부터 만루 홈런이 터져 나왔다. 연장 10회 MBC의 이종도가 삼성 이선희의 3구를 통타, 좌월 만루 홈런으로 연결하며 3시간 57분의 혈투에 종지부를 찍은 것.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을 가리는 한국시리즈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전기리그 우승팀 OB 베어스와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은 7전4선승제로 챔피언 가리기에 들어갔고, 시리즈 전적서 3승1무1패로 앞선 OB가 6차전에서 김유동의 만루 홈런으로 승부를 마무리지었다. 공교롭게도 삼성은 시작과 끝의 주연을 MBC와 OB에 내준 완벽한 조연이 되고 말았다.

개막전, 5대0으로 앞서가던 삼성은 5회 이만수의 사상 첫 홈런으로 6대2를 만들며 최강다운 면모를 보였다. 6회 백인천, 7회 유승안의 동점 3점 홈런을 맞았을 때도 삼성 더그아웃은 여유가 넘쳤고 선수들은 승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권영호 영남대 감독은 "마운드를 지킨 이선희는 실업무대를 주름잡는 국내 최고의 왼손투수였다. MBC선수들이 그의 공을 때려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원년 첫 경기의 부담감은 실업무대와는 달랐다. 이선희의 볼 끝은 날카롭지 못했다. 9회 만루 위기를 넘겼으나 10회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김인식의 몸에 맞는 볼과 김용달의 2루타로 1사 2, 3루. 다행히 유승안이 친 공이 짧아 김인식을 홈에서 태그 아웃시킨 삼성은 한숨을 몰아쉬었으나 2사 1, 3루에서 백인천이 타석에 들어섰다. 이선희는 벤치의 작전대로 고의사구로 루를 채운 뒤 이종도와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너무나 아픈 결말을 낳았다. 끝내기 만루 홈런. 프로야구 흥행엔 불을 지폈지만 삼성과 이선희가 받은 충격은 컸다.

그러나 삼성은 전열을 가다듬어 후기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10월 5일부터 열린 한국시리즈. 삼성은 개막전의 쓰라린 아픔을 원년 챔피언으로 되갚으며 프로야구 역사의 암을 명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OB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1차전에서 4시간 33분 동안 15회를 치렀으나 3대3의 점수를 바꾸는 팀은 없었다.

삼성은 2차전을 이겼으나 내리 3경기를 내주며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맞은 6차전. 3대3으로 팽팽히 맞선 9회 초 투아웃 만루. 신경식을 마주한 투수 이선희는 정면 승부를 피하며 볼넷으로 밀어내기 역전을 허용했다. 한 번의 공격이 남아있음이 밀어내기를 선택한 이유일 법했지만 계산은 개막전 때처럼 어긋났다. 백인천을 대신해 이종도를 선택했듯 이날 타율 0.334의 신경식보다는 시즌 타율이 0.245에 그친 김유동을 선택한 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실책이 됐다. 던진 초구가 배트에 맞아 펜스 너머 날아가자 이선희는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원년 15승을 거둔 삼성의 에이스. 1973년 실업무대에 뛰어들어 두 번의 노히트노런(1977년, 1978년)과 매년 투수 부문에 자신의 이름을 도배시킨 한국 최고의 투수는 두 번의 결정적 희생양이 되며 '만루 홈런' 제조기라는 불명예스런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 매니저였던 김종만 대구시야구협회장은 "4차전이 끝날 때쯤 황규봉의 부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황규봉이 자리를 비우자 다음 경기부터는 던질 투수가 마땅찮았다. 그때 이선희가 자원했다. 그는 한국시리즈서 너무 많은 공을 던졌다"고 했다.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는 "두고두고 남을 두 번의 명장면을 연출해줬으니 프로야구 역사에 적잖은 이바지를 했다고 본다. 30주년을 맞은 올해 나만큼 인터뷰를 많이 한 선수도 없을 것이다. 한동안 충격을 받았지만 다 지난 일이다"고 했다.

그는 "삼성과 계약서에 사인하는 날 아버지가 임종하셨다. 창단식 날 모두가 가슴에 빨간색 장미를 꽂고 있을 때 홀로 백장미를 꽂았고, 그 뒤 장례를 치렀다. 부친의 임종, 2번의 만루 홈런. 그해 온갖 액운이 끼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이선희를 잊지 않도록 부친이 큰 선물을 해준 것 같다"며 웃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서 다승왕, 구원왕, 대회 MVP를 거머쥔 국가대표 왼손투수. 국방의무 때문에 일본 진출을 포기해야 했고 아플 땐 진통제를 먹고 경기에 나섰던 이선희. 그가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 중 5경기에 등판해 31.1이닝을 던졌고 전날 5.2이닝을 던진 뒤 그날 완투하다 홈런을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나 있을까.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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