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신뢰의 붕괴

입력 2011-06-02 10:58:40

메리 포핀스는 은행가인 뱅크스(Banks) 가족의 유모로 들어간다. 하루는 뱅크스의 고집으로 그녀는 아이들을 그의 은행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은행 회장 도스는 뱅크스의 아들 마이클에게 용돈 2펜스를 예금하라고 강권한다. 그렇지만 그 돈으로 은행 밖 비둘기에게 모이를 사주고 싶었던 마이클은 도스에게 "돌려주세요! 내 돈 돌려주세요!"라고 외친다. 안타깝게도 은행에 있던 고객들이 이 외침을 듣고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다른 예금자도 모두 같은 대열에 선다. 결국 은행은 예금 지불을 중단하게 되고 뱅크스는 해고된다.

뮤지컬 배우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한 '메리 포핀스'(1964)의 한 장면이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한 영화적 허구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이나 유럽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어떤 은행이 위험하다더라는 소문만으로도 예금자들은 돈을 찾으러 은행으로 달려갔다.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뜻하는 '뱅크런'(bank run)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이런 일은 금융산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예금자 보호 제도가 정착된 21세기에도 벌어진다. 2007년 주택담보대출 전문 은행인 영국의 노던 록이 잉글랜드 은행에 유동성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는 발표가 나온 뒤 뱅크런의 파도에 쓸려 결국 국유화된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는 내 돈을 떼이지 않을 것이란 믿음, 언제든 요구하면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것이 금융의 본질이다. 이런 믿음은 매우 강하고 견고한 듯 보이지만 때로는 매우 취약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진다. 이처럼 신뢰는 사소한 이유로도 무너지는데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공모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너무도 뻔하다.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는 이처럼 연약하고 민감한 신뢰를 대주주와 감독기관, 정치권이 한통속이 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다. 대통령의 측근인 감사원 감사위원과 금융기관의 불법'부정을 적발하고 시정해야 할 전 금융감독원장까지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영업정지로 많은 서민들이 생돈을 떼이게 됐지만 VIP 고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영업정지 직전 예금을 빼냈다. 영업정지 정보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런 사실들의 조각을 이어붙이면 드러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합작해서 서민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내 돈을 지키라고 세워둔 감시견이 짖기는커녕 도리어 그걸 뜯어먹고 있다면 누가 은행에 돈을 맡기겠는가. 금융기관의 건전성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인 BIS 비율마저 속이는데 무엇을 속이지 못할까. 저축은행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기관에서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의 파탄과 윤리의 마비는 이미 우리 사회의 만성 질환이 된 것은 아닌가.

이런 의심들이 불식되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신뢰는 국가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 수많은 학자들이 실증적으로 입증한 사실이다. 경제발전에서 신뢰의 역할을 천착해온 스티브 낵 같은 경제학자는 미국과 소말리아의 엄청난 소득 격차를 설명하면서 미국 국민소득의 0.5%만이 땀을 흘린 결과이고 나머지 95.5%는 신뢰의 결과라고까지 했다. 극단적인 주장이지만 그만큼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뢰는 페어플레이와 동의어다. 공정하지 않은데 어떻게 신뢰가 쌓이겠는가. 그러나 고위 공직 후보자에 대한 국회 청문회가 보여주듯 우리 사회 기득권층은 반칙과 불공정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자기희생)는커녕 당연히 지켜야 할 것도 지키지 않았다. 이를 통해 부와 명예와 권력의 삼위일체를 이뤘지만 윤리와 도덕은 질식했다. 부산저축은행 비리는 그러한 이기심이 서민 돈의 갈취라는 가장 치사한 몰골을 하고 나타난 사건이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좀처럼 회복할 수 없다. 다시 신뢰를 쌓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을 누가 해야 하는가. 바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신뢰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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