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흑백TV에서 김추자를 보는 것은 들끓음과 불온함 그 자체였다. '그리워 그리워 너무나/ 그리워서 울다 잠이 들면/ 그 님은 나를 찾아서 꿈 속에 있네 쉘라!' 이미자의 단정함을 넘어 문주란의 저음을 지나 남진의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과 손짓이 현란했던 '님과 함께'까지 두루 섭렵했던 우리들이었지만, '꿈 속의 나오미'를 부르는 김추자는 단연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착 달라붙은 드레스를 입은 채 도발적인 몸짓, 거기에 '황홀한 황홀한 달빛이 찬란하게 떨어지는 이 밤' 부분에 들어서면 우리는 채널을 돌려야 할지 말지 민망해 하며 괜스레 쑥스러워했다. 그때 김추자를 듣고 열광한다는 것은 결코 모범적이지 않게 여겨졌던 탓이다. 그저 그 시절에 우리가 부르는 노래라면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입을 동그랗게 만들어 부르던 '꽃밭에서'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을 돌리면서도 끌리게 만들던 챙한 그 음성은 얼마나 고혹적이던지. '장미꽃 백합꽃 만발한 넓은 들에 님과 단 둘이 긴긴 밤 지새도록 마냥 걸었네 쉘라'란 가사는 또 어찌나 '뜯어먹다 끌려가 잡아먹힐 것 같은 마귀할멈'의 과자집이나 불량식품처럼 또는 꽃무늬 원피스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술집 언니'처럼 위험하고도 퇴폐적이어서 또다시 되돌아보고 싶게 만들던지.
우리에게 '김추자'는 그랬다. 해병 모자를 쓴 마린룩 차림으로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를 부를 때도, '늦기 전에---'를 길게 늘어뜨려 부를 때에도, 왠지 가까이 가면 분명히 델 듯한 벌겋게 단 연탄집게 같은 일종의 금기나 위반, 전복, 일탈을 내포하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 나는 서슬 푸르던 동맥경화와 경직의 그 시절, 전위적이기 짝이 없었던 그 여가수에 대한 끌림을 떠올리며 '불온서적 초판을 펼칠 때처럼/ 끓는 냄비 뚜껑 맨손으로 열 때처럼…'으로 시작되는 '김추자'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일종의 나만의 '오마주 김추자' 또는 당시의 드러내놓고 열광하지 못한 끌림에 대한 아쉬운 소회였던 셈인데, 작금의 한 방송사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니 그때 그 '단내 나던 열정의 세기 저 편에서 … / 쇼쇼쇼, 사이키델릭, 허스키 보이스 록의 몸짓으로/ 위선의 가림막 벗겨'내던 그 여가수가 지금 참 그립기도 하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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