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친구와 리움미술관에 가서 제프 쿤스의 '리본을 묶은 매끄러운 달걀'을 봤다. 옛일이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다. 몇 년 전, 예술이라는 말과 '파리'라는 도시가 동의어가 되어 내 무의식을 지배한 지 삼십 수년 만에 용기를 내 무리하여 파리로 갔던 것이다. 친구들은 불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너 어쩔래. 딴죽을 걸었지만 흥, 파리 사람들 내가 다 왕따시킬 거야, 그러고선 떠났다.
사전에 숙지해둔 책자의 내용대로 드골 공항 입국 절차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끝내고, 지인의 도움으로 리용역 근처 고흐의 노란 방 같은 숙소에 짐을 끌렀다. 그러고도 오후의 해가 말갛게 떠 있어 동네를 한 바퀴 휘휘 둘러보았다. 파리의 거리는 이른 가을바람에 낯설고 차가웠다. 참 쓸쓸했다. 천애(天涯), 절대 고독이란 말이 낙엽처럼 거리에 뒹굴었다.
하지만 그 후 온 파리를 오렌지 카드(파리 지하철 일주일 패스)까지 끊어 일일이 토큰을 끊을 필요 없이 가고 싶은 대로 다 돌아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 파리에 갔던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리의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봉마르셰에서 만난 한국인 아트컨설턴트에게서 키치작가 제프 쿤스의 베르샤유 전시에 대해 듣게 되었다. 예술에 관한 한 비교적 관대한 파리 사람들은 관례를 깨고 의외적으로 일부 시민단체들의 전시 반대시위까지 TV와 일간지를 뒤덮는다고 했다.
이 전시는 말하자면 경복궁 근정전 옥좌 앞에 '암퇘지' 식당의 어릿광대 풍선을 놓아둔 격인데, 실제로 베르사유에 가 보니 태양왕 루이 14세의 근엄한 초상화 앞에 제프 쿤스의 멍멍이 풍선 작품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리에선 드물게 호오(好惡)가 엇갈린 그 '무엄한' 전시는 근대에 함몰되어 비교적 취약한 파리 컨템포러리 아트(현대예술)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예견과 환호, 또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 일부 파리 시민들의 단발 시위로 내가 파리를 떠나올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제프 쿤스의 천문학적 가격대라는 작품을 몇 년 후 서울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예술사의 새 장을 연 작품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뒤샹, 피카소, 워홀, 바스키아, 허스트 등의 작품들이 모두 충격적인 시도와 실험, 들끓는 논란에서 탄생되었으니, 예술가의 새로운 실험정신은 평론가의 '새것 콤플렉스'와는 다르게 언제나 옳은 듯하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