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왜관 경제 '젖줄'…주둔 50년만에 불안의 땅으로

입력 2011-05-24 10:31:09

미군기지 캠프캐럴 明暗…왜관지역 상권 먹여살려 1년새 인구 9천명 늘기도

왜관 미군기지 캠프 캐럴 안에 고엽제가 매립됐다는 의혹이 불거진 뒤 미군부대에 대한 주민들의 시선이 싸늘하다. 캠프 캐럴 주변 상가도 인적이 드물어 한산하다.
왜관 미군기지 캠프 캐럴 안에 고엽제가 매립됐다는 의혹이 불거진 뒤 미군부대에 대한 주민들의 시선이 싸늘하다. 캠프 캐럴 주변 상가도 인적이 드물어 한산하다.

한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했던 왜관 미군기지'캠프 캐럴'이 이제는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이번 고엽제 의혹사건으로 캠프 캐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더욱 더 싸늘해졌다.

왜관 캠프 캐럴은 한국전쟁이 수습되어 갈 무렵인 1960년도 병참장비 부대로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벌써 50년이 훌쩍 넘어갔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지역에 머물면서 한쪽에서는 "지역 경제의 불씨를 살렸다"는 주장에 반해 또 다른 쪽에서는 "어설픈 기지촌 문화와 쓰레기만 남겼다"고 하는 등 명암이 뚜렷이 갈리고 있다.

당시 왜관을 비롯한 농촌지역의 모습은 어디곳 하나 다를것 없이 헐벗고 굶주렸다. 한 마을에서 한 두 부잣집을 제외한 사람들 거의가 하루하루 끼니를 떼우는 일 걱정이었다. 먹을 것만 있으면 입고 자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이런 시절에 왜관 지역은 캠프캐럴이 들어오면서 모든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왜관 사람들은 캠프 캐럴이란 이상한 영어 단어가 낯설어 제대로된 발음으로 읊조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귀에 익고 친해져 가는 사이 왜관이라는 동네에 서서히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박모(72)씨는 "미군부대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먼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뒤따라 돈이 거리에 마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면서 "당시 미군부대의 주둔은 조용한 농촌의 소도읍에서 일어난 마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왜관은 먼저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평택, 의정부, 동두천,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거주하던 미군 부대 종사원들이 속속 이주해오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과 함께 이방인인 곱슬머리 흑인과 노랑머리 백인 병사들이 덤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느날 갑자기 왜관마을이 마치 국제도시가 된 듯 시끌벅적해진 것이다. 특히 '후문'으로 통하는 캠프 캐럴의 본거지인 석전마을은 유독 더 심했다.

인구통계로서도 당시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미군이 왜관에 처음 주둔한 1960년도의 칠곡군 전체 인구가 9만4천684명이었으나 이듬해에는 10만3천596명이었다. 불과 1년새 8천912명이 늘어난 것이다. 이 가운데 왜관읍에서만 3천783명이 늘어나 인구 10만명이 넘는 지자체로 우뚝 올라서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관읍의 경제는 어느새 미군병사들과 미군부대 근로자들이 쥐락펴락했다. 그때 사람들은 지금처럼 자가용이란 자체를 몰랐고, 국도라는게 먼지만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로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 처럼 교육문제도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구나 큰 도시에 나갈 줄 모르고 왜관에 눌러앉아 살게 됐다.

당시 캠프 캐럴에 근무했다는 김모(76)씨는 "그때 공무원 봉급이래야 고작 8천~9천원, 아무리 많이 받아도 1만원 안쪽이었지. 그런데 미군 병사들은 700~800달러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30만~40만원으로 엄청났어. 근로자인 나도 2만~3만원 정도는 됐다"고 회상했다.

캠프캐럴의 미군병사들과 한국인 근로자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 처럼 풍족한 곳간을 가졌던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걸치고, 웅장한 집을 사고, 하고 싶은 취미를 통해 맘껏 즐기는 과정에서 왜관읍내의 경제가 그야말로 잘 돌아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일반 직장인들의 하루 근무시간은 보통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였다. 그러나 미군부대는 1시간이 빠른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만 되면 퇴근했다. 여름의 경우 해가 중천에 떠있을 시간인데도 그때부터 식당과 술집은 물론 모든 상권이 생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공무원 박모(53)씨는 "왜관읍내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군부대 캠프캐럴이 왜관지역을 거의 먹여 살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며 "5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그때의 미군부대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씁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칠곡·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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