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낙동강 시대] <43> 상주 대비마을①

입력 2011-05-18 07:18:42

"봄에 보리 한말, 가을엔 나락받고 배 끌었지" 1980년대까지 나루

대비마을 전경.
대비마을 전경.
대비마을 지도
대비마을 지도
1980년대 후반까지 대비마을과 상주 도남마을을 이었던 대비나루의 나룻배. 김팔수(63) 씨가 뱃삯으로 쌀을 받아 담는 말통을 메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대비마을과 상주 도남마을을 이었던 대비나루의 나룻배. 김팔수(63) 씨가 뱃삯으로 쌀을 받아 담는 말통을 메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50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와 마을의 안녕을 가져온다는 그네.
50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와 마을의 안녕을 가져온다는 그네.

태백에서 발원한 강물은 봉화, 안동을 거쳐 남하하다 예천 지보에서 서북으로 치고 올라간다. 삼강에서 내성천과 금천의 물길을 받아들여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다 영강을 머금은 뒤 서쪽 병성천과 동쪽 위천을 합쳐 곧장 남쪽으로 내닫는다.

상주시 중동면은 바로 북쪽과 서쪽, 남쪽 등 3면이 낙동강 물길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중 낙동강 물길이 병성천 물길을 받아들인 지역의 바로 동남쪽 강변에 둥지를 튼 마을이 중동면 오상2리 대비마을이다. 대비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터를 잡은 본마와 임하댐 수몰민이 정착한 새마 등 60여 가구 주민 140여 명이 오순도순 어우러져 살고 있다.

◆오상리, 큰 날갯짓(大飛)과 작은 날갯짓(小飛)

오상리(梧上里)는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오동나무가 많은 윗마을은 오상리, 아랫마을은 오하리였다. 1914년 이후 오상리와 오하리, 구중리 일부를 합해 오상리로 불렀다. 오상1리는 오동, 머거티, 진등, 까치골 등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됐고, 오상2리는 1602년 상산 김씨 입향조인 김일래 선생이 터를 잡은 본마와 1990년 임하댐 수몰민이 정착한 새마 등으로 이뤄진 대비이다. 대비는 비란 또는 큰비란으로도 불린다.

대비마을은 낙동강이 북서쪽으로 둘러싼 가운데 비봉산 남쪽 끝줄기인 구무산(九舞山)과 장갈산(將碣山)이 북쪽에서 마을을 감싸고 있다. 구무산과 장갈산을 축으로 북쪽과 남서쪽에는 각각 야트막한 야산, 신구실(新舊室)과 불텀산(붉은덤)이 날개를 펴고 있다.

이처럼 대비는 하늘을 나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풍수지리적으로 조비포란지형(鳥飛抱卵之形)이라고 '나루의 고장-중동'(2009년 발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대비의 마을 이름도 조비포란을 줄여 '비란(飛卵)'이라고도 했다. 구무산과 장갈산이 새의 몸통이고, 신구실과 불텀산이 각각 새의 양 날개인 셈이다. 구무산의 근원인 비봉산도 '봉황이 하늘을 날 듯' 정상이 봉황의 머리처럼 우뚝 솟아 있고, 좌우 능선이 날개처럼 뻗어 있다고 이름이 붙여졌다. 장갈산은 옛날 한 장수가 말을 타고 지나다 사각모양 바위를 밟자 발자국이 바위에 새겨졌다고 '장갈'(將碣)로 불렸다고 전한다.

현재 조비포란의 형세를 지닌 큰 마을인 오상2리는 '대비'(大飛), 인접한 작은 마을인 죽암2리를 '소비'(小飛)로 부르고 있다. 대비마을은 동쪽으로 중동면 소재지인 오상1리, 남쪽으로는 죽암리와 각각 경계를 이루며 북쪽과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둘러싸고 있다.

◆나루의 고장, 대비'강창'회상나루

서'남'북쪽 등 3면이 낙동강으로 둘러싸인 상주시 중동면은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상주시내로 나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수적이었다. 사람과 물자의 교통과 이동에는 나룻배가 불가피했고, 그만큼 나루터도 많았다. 중동면에는 근대까지 나루터가 11개나 있어 지금도 '나루의 고장'으로 불리고 있다.

대비마을 인근에만 상류쪽 낙동강과 병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대비나루터가 있었고, 하류 쪽 현 강창교가 있는 자리에 강창나루터가 있었다. 대비나루 북쪽 현 경천교 자리에는 회상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영강을 품은 낙동강이 상주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의 하나로 절벽을 깎아내린 경천대를 지나 경천교와 자전거박물관이 있는 자리에 회상나루, 병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대비나루, 죽암리 강창교가 지나는 자리에 강창나루 순으로 형성됐던 것.

대비나루는 대비마을과 상주시 도남동을 잇는 나루로, 강 건너 도남서원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무임포(無任浦)로 불렸다고 한다. 대비사람들은 강 건너 상주시 도남동과 사벌면을 가기 위해 이 나루를 이용했다. 조선시대까지 부산 소금배가 올라오고 교역이 활발했던 대비나루터 자리에는 현재 낙동강 상주보가 건설되고 있다. 대비나루 뱃사공은 장대를 이용해 강바닥을 짚어가며 나아가는 '배질미질'을 통해 배를 몰았다고 한다.

대비나루보다 규모가 큰 강창나루는 옛날 소금배가 드나든 것은 물론 주민들이 상주시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나루였다. 1980년대까지 나루가 있었고,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창일 때는 뱃사공이 8명이나 있었고, 주변에 주막도 5곳 있었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서동규(77) 씨는 "상주보 하고 있는데, 그기 옛날 나루터라. 일 년에 봄에 보리 한말 받고, 가을에는 나락 받고 이랬지. 강변 양수장 좌측에 오막살이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게 뱃사공 집이었어. 옛날에 사벌면 가면 무조건 일로 갔지"라고 말했다.

김팔수(63) 씨는 "강창(나루터) 저기는 시장가기 위해 많이 이용했는데, 조가 한 8명 정도 됐지. 강창나루는 우시장 가기 위해 소를 싣고 갈 정도로 배가 컸어"라고 했다.

상주 중동면 죽암리 강창과 낙동면 신상리를 잇는 강창나루 주변에는 관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을 정도로 물류교통이 활성화됐던 곳이다.

나루는 차량이 보급되고 중동면 지역과 상주시를 잇는 다리가 잇달아 생기면서 모두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중동면 신암리 중동교, 죽암리 강창교(1992년), 회상리 경천교(2007년) 등이 새겨났고, 뱃길과 육로로 상주시내까지 1시간 이상 걸리던 길은 차량으로 20분 안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500년 느티나무와 그네

대비마을 입구에는 팔각정과 함께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수령 500년가량 된 이 느티나무는 옛날 마을제사(동제)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신성시되고 있다.

주민들은 40~50년 전까지 매년 음력 4월 8일(석탄일)과 5월 5일(단오) 새끼로 꼰 그네를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 마을의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평안을 기원했던 것이다. 주민들은 그네를 걸고 난 뒤 풍악을 울리고 술을 마시며 신나게 하루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그네를 타고 논 뒤 다음날에는 반드시 그네를 철거했다.

특히 매년 단옷날에는 반드시 느티나무에 새끼로 꼰 그네를 매달았으며, 1990년대 초반 이후 새끼 대신 밧줄을 구입해 사용했다. 그러다 5, 6년 전쯤 '미신' 등 논란이 벌어져 한때 그네 매는 행위를 중단했다 큰 화를 입고 이듬해부터 다시 그네를 매기 시작했다. 그네를 매지 않은 해 주민들 중 사고나 숙환으로 잇따라 숨지는 일이 발생, 그네를 매지 않아 이 같은 변고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서동규 씨는 "5월 단옷날은 틀림없이 그네를 매거든. 젊은 사람들이 모여가 전부 짚을 단단씩 걷어가지고 같이 꼬고 했지, 한 10여 년 전까지. 그 뒤에는 좋은 게 나와가지고 그네줄을 샀어.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네를 매달았어"라고 말했다.

대비 주민들은 지난해부터 느티나무에 더 이상 그네를 매지 않고 있다. 그네를 맨 느티나무가 허약하고 상처를 입는 바람에 나무가 건강해질 때가지 마을회관 뒤편 창고에 그네를 보관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여수경'이재민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장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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